일왕 항복 후에도 끝까지 한국 광복을 방해한 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연합군으로 미군과 같이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광복군

무장해제 않은 일본군의 방해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가

일왕의 패전방송 듣고 김구는 절망의 눈물로 미래 비관

1945.11.23.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 개인 자격으로 귀국

▲ 중국 상해 비행장에서 떠나기 전 임시정부요인들과 광복군 핵심 대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편집인 주).
▲ 중국 상해 비행장에서 떠나기 전 미군군용기 C-47 앞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광복군 핵심 대원들 및 미군 OSS요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편집인 주).

 

해방후 한반도에 급거 진입한 임정 광복군 대원, 그들은 하루만에 해방된 조국 땅을 떠야 했다>

 

1945년 8월 18일 오전 11시 장준하 등 광복군 정진대원 4명이 경성비행장(현 여의도공원)에 처음 닿을 때 사용했던 미군 수송기와 같은 모델이다.

C-47 수송기는 아이젠하워가 2차대전 당시 연합국의 승리에 공헌한 4대 병기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로 전선에 물자와 병력이 끊임없이 보급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광복군 정진대가 착륙한 지점에 실제 C-47 비행기를 세워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1. 해방직후 경성비행장에 도착한 임정요원들

1945년 8월 18일 경성비행장에 C-47 수송기 한대가 착륙했다.

수송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정진대원인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와 버드중령과 함께 미국전략정보처 OSS(미 CIA의 전신)

대원들 22명이다.

중국 시안에서 날아 온 것이다.

그들 주변을 착검을 한 일본군들이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일왕의 항복 이후에도 한반도의 일본군은 본국으로부터 아직 무장해제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돌격태세를 취한 것이다.

50m쯤 떨어진 격납고 앞에는 1개 중대가 있었으며, 중형 전차의 기관포도 비행기를 향해 있었다.

▲ 현재 여의도 공원에 전시 중인 C-47 비행기.
▲ 현재 여의도 공원에 전시 중인 C-47 비행기.

 

2. 임시정부 광복군과 미군은 국내진공작전 준비

해방직전 임시정부의 군사훈련방향은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펴는 것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후 연합군과 대일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후 연합군 지위 획득을 노린 임정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주석과 OSS 사전트 대위가 양국합작문제를 합의했는데, 미군은 훈련과 장비를 제공하고 광복군은 대일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미군에 제공하기로 했다.

광복군 요원들의 OSS 훈련은 5월 21일~ 8월 4일중 진행되었고 수료자는 38명이었다. 20여 명의 2기생 훈련도 7월 7일 시작됐다.

8월 20일까지 4∼5명씩 공작반 8개조를 편성한 뒤 낙하산이나 잠수정으로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구상을 했다.

근데 일본이 느닷없이 항복했다.

김구 주석은 우리 손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해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

결국 광복군을 하루라도 빨리 국내 진입시켜 미군의 협력을 받아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해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자 광복군 대원 4명을 국내 진입시켰다.

영국에서 독립운동하다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한 프랑스 드골 장군의 전례를 따르려 한 것이다.

▲ 해방직 후 경성 비행장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원들
▲ 해방직 후 경성 비행장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원들

 

3. 일본군의 위협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다

일본군의 위협적인 태도와 경계를 뚫고 양측대표가 만났지만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일본은 지금은 정전 상태이니 일단 돌아가고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들어오란 것이고,

우리측은 일왕이 무조건 항복했으니 도쿄의 지시가 필요없다고 했다.

근데 그들이 만나던 탁자 주위로 일본군이 포위하며 무력으로 협박하는 바람에 버드중령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중국으로 되돌아 가기로 합의했다.

광복군 대원 4명은 해방된 조국에 처음으로 들어와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빽도한다며 침통해 했다.

도착 28시간 지난 19일 오후였다.

이들은 광복군 이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도착한 네 명이 됐다.

광복군의 첫 귀환 석 달 뒤인 1945년 11월 23일 C-47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을 통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원 15명이 조국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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