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대장 왕산 허위의 죽음에 이완용의 공작이 있었다.

 

글: 류돈하(역사 연구가)

 

신기선의 손에서 단재 신채호, 왕산 허위 등 배출

왕산 허위, 석주 이상룡 등 관중과 제갈량 버금가

을사늑약 후 왕산 허위 등 의병 전쟁에 투신 활약

왕산 허위 경기 연천서 13도 창의군 봉기 서울 진격

왕산 허위 체포, 서기 1907.09.18. 사형선고 뒤 집행

이완용, 왕산이 나라 체모를 욕보였다고 사형 독촉

 

▲ 양원 신기선의 문집
▲ 양원 신기선의 문집

 

한말에 이조판서, 군부대신, 법부대신을 지낸 양원 신기선(陽園 申箕善:1851~1909. 을사늑약 후 일본의 협박 때문에 친일파로 변절함)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산신씨로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의 9대손이다.

양원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1936)의 조부 신성우와 친분이 있었다. 사간원 정언을 지낸 신성우는 갑신정변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총명하기 그지없던 손자 단재를 신기선에게 소개하였다. 신기선은 단재의 총명함에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1898년 19세 소년 단재를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였다.

이윽고 신기선은 또 한 사람을 중앙정계라는 무대에 이끌게 된다. 바로 왕산 허위 (旺山 許蔿)이다. 신기선은 고종황제에게 왕산을 천거하였다.

그 천거의 이유는 왕산의 경륜과 포부는 관중과 제갈량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구한말 당시 왕산 외에 그 경륜이 자못 제갈량에 비유되었던 사람이 몇 명 존재하였다.

그중에 석주 이상룡도 있었다. 실제로 석주의 만사를 보면 그의 인척들과 제자들이 그의 삶을 평가하기를 제갈공명에 비유한 사례가 매우 많았다.

풍선 김 씨의 김인흠, 김락충, 청송심씨의 심재한, 심창한, 경주김씨의 김덕희, 풍산류씨의 류지우 등등의 만사는 한결같이 석주를 “오장원의 충신”, “제갈무후”에 비유하였다.

특히 석주의 표종제 김락충의 만사에는 헤아려보고 도모해 보아도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남겼다.

과연 석주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되찾는 일(國事)에 진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한편 관직에 천거된 왕산은 출사한 지 수년 만에 평리원 수반 판사, 의정부 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왕산은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거세어진 일진회의 타도를 위해 조직적인 반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운동에는 자신의 형 성산 허겸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어 “배일격문”을 작성하여 이를 통해 전국의 동포들 즉 국민에게 일본의 국권강탈을 고하고 의병봉기를 촉구하였다.

이 배일격문 사건으로 일본 측은 매우 강도 높은 압박을 하였고 왕산을 헌병대에 구금토록 하였다. 4개월의 구금 끝에 석방된 왕산은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맏형 방산 허훈(許薰 舫山)은 전답 3천여 두락을 제공하였으며, 이는 의병 구국 활동의 자금으로 쓰이게 된다.

왕산 본인은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전 경북 영천의 산남의진 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등 방방곡곡 전국적인 창의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 적성에서 창의하였으며, 여기에는 형 성산과 21살 된 장남 박경 허학(博卿 許壆)도 참전하게 된다.

이는 곧 13도 창의군으로 이어진다. 왕산은 군사장으로 활약하였다.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며 동대문 밖 30리까지 나아갔다가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중단되고 이 작전 후에는 부친상을 당해 낙향한 이인영을 대신해 왕산이 총대장으로 전국의병을 지휘하게 된다.

그 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일본군보다 비록 군사력은 강하지 못했을지라도 지리와 병법에 뛰어난 왕산의 지휘력은 혁혁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잘 방어해내었다. 하지만 전세는 점차 불리해졌고 결국 왕산은 그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당해 서울로 호송되고 만다. 1908년 6월의 일이다.

왕산의 체포 직후 친일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이완용은 왕산의 처벌에 집착하였다. 나라의 체모를 욕보였다는 희한한 전지적 이완용 시점에서 왕산의 삭탈관직과 처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왕산은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0월 21일 오전 10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왕산의 나이 겨우 54에 불과했으며 그 시신은 제자 고헌 박상진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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