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자신의 뿌리 부여를 잊지 않기 위해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바꿨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문안식은 인명인 소서노를 집단이름으로 바꿔

소서노를 소노부라고 하고 계루부와 경쟁 관계

백제건국 서기전 18년을 서기 1세기로 깎아내려

백제가 부여 씨라는 것은 국내는 물론

중국 사료에도 보여, 부여 계승한 백제 증명

 

▲ 문안식의 '백제의 왕권'이라는 책은 왕권을 중심으로 바라본 백제 통사라고 할 수 있다.
▲ 문안식의 '백제의 왕권'이라는 책은 왕권을 중심으로 바라본 백제 통사라고 할 수 있다.

 

백제 건국신화 4-2

백제 건국에 대한 문안식의 주장을 들어보자.

- 소서노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압록강 중류 지역 집단인 나(那) 또는 노(奴)의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졸본지역은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비류수 주변의 여러 골짜기에 '나국'(那國)으로 불리는 소국들이 존재하였다.

이들 중에서 처음에는 소노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나중에는 부여에서 이주한 집단이 중심이 된 계루부가 세력을 키워 국가 운영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계루부가 소노부를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자일 수 없고, 훗날 왕권을 장악한 계루부가 자신들의 정통성과 유구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건국의 시조로 꾸며낸 것이다.

소노부의 일부 집단은 계루부의 압박을 피해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내려오는데, 이들이 바로 온조 일파라는 것이 문안식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가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백제의 건국은 온조가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1세기 후반 무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소노부였던 제2대 유리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지 고구려의 왕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성씨는 해씨였다.

온조의 아버지라는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을 자처했으니 백제 왕실도 해씨일 것이다.

이러한 문안식의 주장은 주류 사학계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도학은 문안식과 크게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문안식이 온조 집단은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이었던 소노부 일파로 본 것과 달리, 이도학은 확실한 부여계로 보고 있다.

-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들의 계통이 동일한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부여계로 간주되는데, 백제 왕실의 씨성이 일단 부여씨로서 변화가 없었다는 점, <삼국사기>에 전하는 비류 계통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왕실의 기원이 부여라는 점, 부여 건국시조 사당인 동명묘가 백제에 설치되었다는 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라는 문구, 성왕이 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하면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점 등을 제시할 수 있다.

백제가 6세기 중반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음은 건국에서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족원을 부여에 두었던 세력이 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전진(前秦)왕 부견이 전연(前燕)의 수도 업(鄴)을 공격했을 때 전연의 산기시랑 여울이 '부여질자'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어 부견의 군대를 맞아 들이는데, 그 주에 '여울은 부여 왕자인 까닭에 몰래 여러 질자(質子)들을 이끌고 문을 열어 진나라 병사들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주석대로라면 '여'는 '부여'의 단자(單字) 표기가 분명하니, 부여에서는 해씨뿐 아니라 부여씨 또한 왕실의 씨성이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백제 왕실의 족원이 부여였고, 부여에서도 최고 지배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핵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다시금 확인된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