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반도와 대륙에 두 개의 백제가 존재하였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백제가 대륙 부여의 후예인 이유

북부여 출신 고주몽에게서 온조와 비류 출생 설

온조와 비류가 북부여 후손 우태에게서 나왔다는 설

중국 사서에는 구태가 부여의 후손으로 백제 시조로

 

▲ 고구려를 떠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려는 소서노.
▲ 고구려를 떠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려는 소서노.

 

 

백제 건국신화 4-1

백제는 왜 자신들이 부여를 잇고 있다고 했을까?

<삼국사기>는 비록 설화의 형태이기는 하나 백제 건국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이 (중략)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 따르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기>는 계속하여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야기, 비류가 온조가 있는 곳으로 합류하니 나라 이름 십제를 백제로 고쳤다는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삼국사기> 기록을 더 따라가 보자.

그들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서 씨를 삼았다.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라 하였다.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를 삼았다. 그가 창업하여 기반을 개척하는데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이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중략)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하였다.

처음에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로서 구태의 아내를 삼게 하였다.

드디어 동이에서 강국으로 되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삼국사기>는 상기한대로 백제 건국에 대해 두 가지 설을 함께 싣고,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도학은 백제 시조는 세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가 온조•비류설이고, 그 다음이 구태설, 그리고 <속일본기>에 나오는 도모대왕설이다.

<속일본기>에 나오는 도모대왕은 동명을 도모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인 주몽을 부여 시조인 동명과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착오를 빚고 있는데, 주몽과 동명은 엄연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것이 이도학의 주장이다.

<속일본기>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백제가 시조묘에서 동명을 모시는 것을 착각하여 백제 건국시조로 쓰지 않았을까?

문안식은 온조는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과 달리 졸본지역의 토착민 출신이라 보았다.

온조의 친부는 북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인 해부루의 후손 우태였고, 모친은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온조는 부여에서 내려와 졸본지역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양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중국 역사서에는 구태를 백제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주서>백제 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또 해마다 네 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백제 조에는 이렇게 나온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두터워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을 국성(國城)에 세웠는데 해마다 네 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한원> 백제 조에도 나온다.

이도학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비류는 고구려와는 무관한 부여계이고,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로 파악하고 있다.

비록 <삼국사기>에 온조•비류의 계통을 고구려 주몽왕의 아들로 적고 있지만, 그렇다면 왜 왕실의 씨성이 고씨가 아니고 부여씨인지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구태는 '대방 옛 땅'(帶方故地)에 백제를 세웠고, 비류•온조는 남하하여 위례성에 또 다른 백제를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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