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 치우의 역사를 알면 한겨레의 대륙사가 보인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치우는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과 탁록대전을 벌인 동이족

치우 후예 묘족 귀주성에 정착, 치마에 3개 강을 건넌 표시

중국 신화에 가장 용맹스럽게 나와 끈질기게 반란, 저항

명 왕조 시기에도 반란, 이를 막고자 명은 장성을 세워

중국 당국은 치우도 중국 조상이라고 중화삼조당에 모셔

 

▲ 치우천왕. 중국은 중화삼조당에 황제헌원, 염제신농과 함께 동이족의 조상 치우천왕도 모셔놨다.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황제헌원과는 다르게 원시인 처럼 그려놨다(편집인 주)
▲ 치우천왕. 중국은 중화삼조당에 황제헌원, 염제신농과 함께 동이족의 조상 치우천왕도 모셔놨다.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황제헌원과는 다르게 원시인 처럼 그려놨다(편집인 주)

 

중국 소수민족 신화 1-1(묘족신화)

그동안 위앤커의 저술을 기본으로 중국신화를 살펴보았고, 유향의 <열선전>과 갈홍의 <신선전>을 중심으로 중국 신선들을 대충 알아본 셈이다.

그러나 중국은 소수민족이 55개나 되니, 한족 중심의 신화만으로는 중국신화를 제대로 살펴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위앤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중국 소수민족 신화'를 별도로 언급하고 있으나, 우리는 김선자 교수가 중국 현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채록한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을 통해 소수민족 신화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중국 남방에 있는 소수민족 신화를 살펴보고, 신장위구르 신화를 언급하려고 한다.

티베트나 내몽고 그리고 만주지역의 신화는 그동안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신화만 선택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숨어 있는 보석'이라는 귀주성(貴州省)은 호남성 서쪽에 있는데, 산악지방이 많아 살기에는 몹씨 불편한 곳이라고 한다.

이 귀주성에는 치우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묘족(苗族)이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묘족이라고 한다.

치우는 신화시대(중국학자들은 황제가 활동한 시기를 서기전 28세기로 상정하고 있다)에 황제와 탁록대전을 벌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있다.

탁록은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으니, 중국 남방에 있는 귀주성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치우가 황제에게 패배한 후, 치우의 한 갈래인 묘족은 중국 중원에서 큰 강을 세 개나 건너 귀주성까지 이주해왔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묘족 여인들의 치마에는 그들이 건너온 세 개의 큰 강을 나타내는 무늬가 있다고 한다.

결국 묘족은 치우가 상징하듯이 그 근원은 동이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신화를 보면 용맹스럽게 저항하는 묘족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때 중국을 제패하던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귀주성까지 쫓겨온 묘족은 그 후로도 10년이 멀다하고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중앙정부의 공격을 피해 산꼭대기까지 피난을 가면서 저항했다.

16세기에 이르자 명나라는 묘족의 끈질긴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남방장성을 쌓아 이에 대처했단다.

장성 안에 사는 묘족은 '숙묘'(熟苗)라 부르고 장성 밖에 사는 묘족은 '생묘'(生苗)라 불렀는데, 이미 명나라 방식에 익숙해진 숙묘와 달리 '날것'인 생묘는 명나라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여진족을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방식과 아주 비슷하다.

명에 이어 청왕조도 190km에 이르는 장성을 계속 쌓는 수밖에 없었단다.

1997년과 1999년에 호남CCTV에 방영된 '염황이제'(炎黃二帝)라는 드라마는 치우를 모욕하는 장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묘족은 치우를 모욕한 자들과 일전불사를 각오하였고, 중국정부는 묘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하북성 탁록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지어 치우를 좌정시켰단다.

중국의 시조로 황제를 모시다가 나중에 염제까지 포함하여 염황이제를 중국의 시조로 받들었는데, 최근에는 묘족의 조상이라는 치우까지 중국의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신화시대부터 현재까지 강한 자부심으로 일관한 묘족이니 그들의 신화 역시 자신들의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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