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명나라 대신 미국이 상전 되어 미국 거스르면 매장시킨다.

 

 

 

어버이로 섬기던 명나라에 뇌물 주고 얻은 왕, 인조임금

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 청 황제 즉위식에 인사도 안 해

청 침공하자 36개 도주, 인조 총 4번에 걸쳐 도성 버려

전쟁 패배 표시 삼전도비의 수난, 세우고 매장하길 되풀이

국가가 저질러 놓고 피해자인 백성을 오랑캐 자식이라 비난

 

▲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패한 이성계 조선이 청나라의 요구로 제작한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 서기1916년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패한 이성계 조선이 청나라의 요구로 제작한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 서기1916년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 조선 인조 : 사대 명분에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식마저 죽여>

1. 명분 핑계로 등장한 인조

잠시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은 광해에게 반기를 들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무리한 궁궐공사, 동생 영창 살해, 인목대비 폐위, 명에 대한 배신 등이 명분이었다.

인조반정은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해 인조 즉위 후 22개월 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인조는 광해군이 재위 중 명에 바친 은 총량을 능가하는 은을 뇌물로 줘야했다.

2. 병자호란을 자초

1636년 청나라 태종 즉위식에 조선 사신은 절도 안 하고 버텼다.

그들은 청 태종이 내린 국서를 들고 귀국했는데 국서를 청나라 황제 앞에서 찢지 않았다는 사유로 귀양 갔다.

열 받은 청 태종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했으나 무시당하자 청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인조는 그의 재임 중 총 3번의 몽진을 해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3. 삼전도비를 세웠다. 수장, 매장 끝에 석촌호수로

청나라는 인조의 항복을 받은 자리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1639년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에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수장.

1913년 일제가 다시 세움.

1945년 해방 후 땅속 매장.

1963년 홍수로 드러난 후 수차례 이전.

2010년 4월 현 위치인 석촌호수 언덕에 세워졌다.

4. 환향녀, 호로자식 대량 배출

조선은 병자호란(1636년) 패배 후 청나라에 공녀를 바쳤다. 추후 이들이 조선에 돌아오자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며 정절 잃었다고 가족들도 꺼렸다. 조정은 그들을 냇물에 몸을 씻게 하고 정절을 회복시켜주었다.

그곳을 널리 구제한 개천, 홍제천(弘濟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과 친지는 그들을 꺼리고 천시했다. 이들이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 :오랑캐의 포로)자식이라 부르며 아주 멸시했다.

5. 자식 며느리 죽이고, 손자는 유배

인조는 병자호란 패배 후 아들들을 청 수도 심양에 인질로 보냈다. 맏아들 소현세자는 청에서 서양인을 만나 천문지식을 배우고 유럽도 알게 되는 등 개안을 하고 9년 만에 귀국하였다.

인조와 추종세력은 그가 오랑캐 세계관을 가지고 왔다고 독살했다고 한다. 세자빈 강 씨도 역모를 꾀했다고 사약을 내렸고 세 자녀를 모두 유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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