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혼으로 무장한 간도특설대 적폐를 청산해야 일본이 얕보지 못한다.

 

이범주(자유기고가)

 

간도특설대 창설,

조선인이 먼저 건의했다고 하나 사실은 배후에 일제가 기획

조선인은 철저한 신원조회와 보증인 2명 세우는 등 거쳐 뽑아

부대 노래 속에 ‘야마토 혼이 우리를 고무, 천왕의 뜻 받들자’

조선인에 매우 잔혹하고 악랄하게 대하고 구타와 욕설이 일상

대한민국은

박정희,정일권, 최규하 등 독립군 학살 간도특설대 출신이 장악

 

▲
▲ 조선독립군을 학살한 만주의 간도특설대는 해방 후 미군정의 비호아래 군을 장악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에는 권력의 핵심으로 나갔고 대한민국의 지배세려이 되었다. 백선엽, 박정희, 정일권 등이 대표 인물이다. 

 

[간도 특설대]를 읽다.

- 1930년대 초반부터 만주에서 일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중국 당국이 공인한 옌볜의 항일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의 비율이 98%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일제에 협력하여 만주에서 호위 호식하던 한 조선인이 ‘일본 상전의 환심을 사려고’ 조선 청년을 징모해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특설부대 창설을 ‘주동적으로’ 건의했다.

일제는 그 제안을 즉각 받아들여 1938년 9월 15일 간도특설대를 창설키로 결정하고 1939년 3월 1일 열병식을 했다.

조선인의 청원은 실은 구실에 불과하고 일제의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해 창설된 것이다.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은 전부 조선인이고 장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다.

1945년 8월 해산되기까지 간도특설대에 입대한 사병수는 2100명에 이르고 부대병력은 평균 300명대를 유지했다.

- 특설대를 지원했던 조선인들의 자질은 낮지 않았다. 18세 이상 20세 미만(혹은 20세~22세)의 일본어 가능 조선인으로서 초등학교,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을 갖춰야 했다.

두 명 이상의 보증인을 요구했고 관공서에서 지원서와 신원조사서 용지를 받아 제출 후 신체검사와 면접절차 거쳐야 했다.

- 이들의 부대가(部隊歌는) 다음과 같다.

-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선구자의 사명을 안고/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야마토 혼은 우리를 고무한다/천황의 뜻을 받은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 특설대의 주요 임무는 소련에 대한 공작, 공격을 기본으로 했지만 일단은 조선인 항일무장세력을 소탕, 섬멸하는 것을 당면한 것으로 하였다.

만군에서 사격, 총검, 검도 경연대회가 있으면 간도특설대가 우승을 휩쓸었다 하고 하며 특설대 안에서의 구타와 욕설은 ‘극히 평범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토벌활동은 다른 부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집요했고 조선사람들을 매우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 처음에 그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무장투쟁 토벌에 진력했으나 40년대 들어 빨치산들이 소련 영내로 이동하면서 토벌대상이 없어지자 주 임무가 중국 관내로 들어가 팔로군과 전투하거나 소련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특설대원들은 자진 해산, 여러 경로를 거쳐 남한으로 들어갔다. 북과 소련에서는 특설대에서 복무했다는 전력(前歷)이 매우 중대한 문제로 되었기 때문이다.

- 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했던 사람들 다수는 남한에 들어와 미군이 개설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 창군과정에 참여하고 해병대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의 고위장교가 되었다.

정일권, 백선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최규하도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

많은 이들이 예편 이후에 국방장관, 도지사 등 정부 고위관료가 되거나 각종 공사의 사장이나 임원이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심지어 특설대에서 장교견장을 달지 못했던 임충식의 경우, 해방 후 육군대장과 국방장관직까지 올랐다.

해병대의 경우 1기에서 3기 사령관까지 모두 특설대 출신이 맡았다.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회장도 간도특설대와 관련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거 같다.

- 간도특설대로 대표되는 부일(扶日)인맥이 미군정의 후원 아래 정치, 군부, 행정등의 영역에서 대한민국 주류의 일부를 형성했다.

반면 사회주의 세력과 임정으로 상징되는 민족주의 세력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1945년 이후 ~ 1953년 정전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자행된 백수십만 학살은 곧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들을 배제하는 잔혹한 과정이었고 이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 한 나라의 이념적 정통성은 인맥을 통해 구현된다. 해방 후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이 체계적으로 제거되고 매국부일(賣國扶日세)력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 시기 권력의 뿌리는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가깝게는 미군정이고 좀 더 소급해 올라가면 일제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 백선엽은 비상시에 쓰라고 모친이 주었던 비상금 200원을 패전 후 일본으로 도주하는 간도특설대 상관에게 주었다.

김일성은 모친이 바느질로 모아서 준 20원을 간직하고 있다가 마안산에서 헐벗는 아이들을 입히는데 그 돈을 썼다.

어쩌면 이게 만주에서 무장을 들고 독립을 위해 싸웠던 측에 있던 조선사람과 그들을 토벌하는 편에 있었던 조선사람 사이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상적인 장면이 되지 않을까.

- 특설대를 지원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당시 만주의 지배적인 사회정치적인 분위기에서 별 갈등과 번민없이 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만주 사회 주류가 특설대의 창설을 반겼고 일제 하에서 태어난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그 만주국은, 특별한 의식이 없는 한, 자신이 살아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이 육사 지원하는 정도의 의미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들에게 그토록 자연스럽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만주국은,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순식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외적 분식(粉飾)이 어떠하건, 본질이 일본의 괴뢰(傀儡)였기 때문이다.

- 만주국이 사라지는 한 장면을 보자.

“그런 목가적 생활은 8월의 어느 날 소련의 참전 이후 갑자기 끝나버렸다. 안자이 쇼샤쿠는 운명의 그날 선박의 수리부품을 가지러 재료창에 갔었다. 중국인 장교가 자기가 갔다 오겠다며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갔다.

나중에 부대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통은 총검술 등을 하느라 시끌벅적했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위병조차 없었다. 부대 막사로 가보니 2층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부대 안에 있던 일본계 장교는 모두 살해됐다.

안자이 쇼샤쿠는 서둘러 부대를 빠져나왔다. 그는 중국인의 반란이 그런 식으로 느닷없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령부가 갈 수 없어서 총은 우물속에 버리고 중국인들 사이로 잠적했다.(300쪽)”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