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기득권 세력은 공동체 이익보다 사익에 목매단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평택 역사 탐방 2

수취체제 폐단이 부른 조선 백성의 참담한 생활상

대동법으로 세금 부담 더하게 된 지주세력의 저항

16세기 나왔으나 전면 실시는 2백년 뒤에 겨우 가능

대동법 실시로 대기근에서 백성 굶어 죽는 것 막아

새로운 직업과 자본의 축적이 가능한 상인의 번성

 

▲ 김육. 인조 때부터 효종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그는 좋은 정책으로 군주를 보좌한 전형적인 예다. 그는 서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다. ⓒ 왕과 나
▲ 김육. 인조 때부터 효종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그는 좋은 정책으로 군주를 보좌한 전형적인 예다. 그는 서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다. ⓒ 왕과 나

 

김육과 대동법

대동법(大同法)은 동양 유교사회의 기본 세법인 조용조(租庸調) 중 농지세인 전세(田稅) 조(租), 즉 공납(貢納)을 쌀로 대신해서 납부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조(租), 즉 전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1결당 최하세율인 4두를 받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1결당 4두의 전세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납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체 국가 세수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세원이 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부과 단위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난한 전호(佃戶, 소작인) 집안이나 부유한 전주(田主, 지주) 집안이나 거의 비슷한 액수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공납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도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의 논리는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에서 전결(田結), 즉 농지 단위로 바꾸어서 일괄적으로 쌀로 납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조광조와 율곡 이이 등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대부분 이를 주장했다. 율곡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은 글자 그대로 수많은 공물 대신(代貢) 쌀을 받자(收米)는 주장이었다.

대동법은 한때 실제로 시행된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실시한 작미법(作米法)이 그것이었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고도 종전과 동시에 쫓겨난 원인 중의 하나가 작미법에 있었다. 작미법, 즉 대동법은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부과 기준을 가호(家戶)가 아닌 전결(田結), 즉 농지결수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호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할 경우 부유한 양반 전주나 가난한 전호는 비슷한 세금을 내야 하지만, 농지결수를 기준으로 부과할 경우 농지가 많은 양반 전주들이 많은 액수의 세금을 내야 했다.

반면 농토 없는 전호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들은 임란 때 작미법을 실시한 유성룡을 종전과 동시에 실각시키고 이 법도 폐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미법(대동법) 폐기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은 컸다. 그래서 광해군 즉위년(1608)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대동법 실시 관청의 이름이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백성들에게는 좋은 제도였다.

남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실시했다가 폐기되었던 작미법을 남인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시범실시하게 된 것이니 대동법은 남인들의 당론인 셈이었다.

인조 때부터 효종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김육(金堉, 1580~1658)은 서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다.

김집·송시열 등으로 대표되는 서인들의 당론은 대동법 반대였다. 그러나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정책적 소신으로 서인들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확대 실시를 주장했다.

대동법 실시를 둘러싸고 서인이 둘로 갈렸다.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이 그것이다. 한당은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했고, 산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당의 당수는 잠곡 김육이었고 산당의 당수는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었다. 김육이 한강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한당으로 불렸고 김집 · 송시열 · 송준길 등이 회덕(懷德), 연산(連山) 같은 지방에 살았으므로 산당으로 불렸다.

잠곡(潛谷) 김육은 '대동법(大同法)의 경세가(經世家)'라고 불릴 정도로 대동법 시행에 정치 인생을 걸었다.

광해군 즉위년에 경기도에 시범실시되었던 대동법은 인조 1년에 강원도에 확대되었다. 인조 16년(1638) 6월 충청감사로 부임한 김육은 충청도에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 사대부들과 비변사의 반대로 인조 때 충청도 확대 실시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효종 즉위년에 우의정에 제수되자 또다시 확대 실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대부들과 부호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효종 2년에 또 확대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효종 2년(1651) 8월 드디어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게 되었다.

김육은 효종 9년(1658)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죽음에 임해서 올린 마지막 상소에서도 호남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했다.

김육의 뜻은 헛되지 않아서 효종 9년 대동법에 찬성하는 군현이 많은 호남의 해읍(海邑)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그후에도 끈질긴 반대로 시행과 혁파가 반복되었지만, 대동법은 계속 확대 실시되어 1662년(현종 3년) 전라도의 산군(山郡), 1666년 함경도, 1678년(숙종 4년) 경상도, 1708년(숙종 34년) 황해도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

▲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은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받자는 방안이었다. 부과단위를 가호(家戶)에서 전결(田結), 즉 농지 단위로 바꾸어서 일괄적으로 쌀로 납부하자는 것이었다. ⓒ 왕과 나
▲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은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받자는 방안이었다. 부과단위를 가호(家戶)에서 전결(田結), 즉 농지 단위로 바꾸어서 일괄적으로 쌀로 납부하자는 것이었다. ⓒ 왕과 나

 

대동법이 가져온 삶의 변화

효종과 현종 때는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렸다. 특히 현종 11년(1670) 경술년과 12년(1671) 신해년에는 경신대기근이라 불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천재지변이 닥쳐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이때는 몰랐지만 16~19세기는 세계적인 소빙기였다. 그러나 많은 반대에도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면서 백성들은 절대적 빈곤에서 차차 벗어나게 되었다.

경신대기근을 극복하는 데 대동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래서 경신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1673)에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가 현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던 것이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1결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1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14년 11월 21일

대소 사민들이 대동법 덕분에 대기근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풀었던 법이었다. 김육을 필두로 조익·이시백·이시방 형제 등 대동법 시행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고위 벼슬아치들의 신념이 만든 변화였다.

대동법이 단순히 백성들의 생활만 개선시켰던 것은 아니다. 대동법은 조선의 경제 전반과 신분제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동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경제였다. 이 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받던 물품을 충당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해야 했다. 그래서 관청에 이런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貢人)이란 직업이 생겨났다.

공인들은 납품할 물건 값을 선불로 받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자본을 축적한 일부 공인들은 선대제(先貸制)로 수공업자를 지배하기도 했다. 수공업자들에게 자재값을 미리 대주어 물품을 제작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상인의 자본이 수공업자를 지배했다는 뜻으로서 자본주의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자본주의의 원초적 형태였다.

출처: <왕과 나>, 이덕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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