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을 걷어내야 우리 역사가 바로 보인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부여는 서기전 12세기에 중국 하북성 난하에 존재

중국의 <상서>, <일주서>가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

부여를 이은 고구려도 요하를 중심으로 하북성 차지

윤내현, 단군조선이 문을 닫자,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사국의 열국 시대로 이어져

식민사학은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국시대로 날조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와 역사 이어져

 

▲  윤내현은 단군 조선이 문 닫은 뒤에 열국 들의 이동을 위와 같이 그리고 있다.
▲ 윤내현은 단군 조선이 문 닫은 뒤에 열국 들의 이동을 위와 같이 그리고 있다.

 

백제 건국신화 2

부여는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 고대사 연구는 학자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여러 갈래여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윤내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부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부여와 고구려는 이미 서기전 12세기에 난하 유역에 있었다.

<상서(尙書)> '주관(周官)' 편,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했다'는 구절에 대해 공안국이 주석하기를, '해동의 여러 이족은 구려(駒麗)•부여•한(馯:韓)•맥 등과 같은 족속인데, 무왕이 상(商)을 이기니 모두 길이 통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중국의 서주 무왕시대인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이미 부여가 존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일주서> '왕회해'편에도 서주 초기에 성주대회에 참석한 나라에 고이(高夷)가 보이는데, 주석에 '고이는 동북의 이로서 고구려다'라고 했으니 고구려는 중국의 서주 초기 서기전 12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부여는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

위만조선에 뒤이어 한나라의 침공으로 고조선 연맹체가 주도력을 서서히 잃어가자 부여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주도권을 이어간다.

그러나 난하 유역에 있던 고조선의 여러 거수국들은 한나라의 영향력 때문에 민족대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난하 상류에 있던 부여는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가 되었고, 해부루는 북부여에서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부여의 또 다른 일파는 동남쪽으로 내려와 졸본부여를 세운다.

부여의 시조가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칭한 것을 보면 단군 계열의 후손일 것이다.

해모수는 단군의 또 다른 명칭일 수 있다.

고구려 역시 여러 갈래로 이동했는데, 주몽은 북부여의 보호를 받다가 남하하면서 옛 부여 땅을 거쳐 졸본부여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다른 부류의 흔적도 여기저기에 산재하여 남아있다.

윤내현의 연구를 거칠게 요약한 내용이다.

느슨한 고조선 연맹체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부여가 고조선을 대신하여 여러 거수국을 통솔하다가, 결국 한나라의 압력에 밀려 민족대이동기에 부여도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는 북쪽으로 옮겨 북부여를 세웠고, 북부여는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모두 요하 동쪽으로 이동하여 혼자 버티기가 어려워지자 해부루가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다만 북부여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의 후손들이 계속 다스렸는데, 304년경 백제의 공격으로 선비족 모용황이 세운 전연 가까이 이주했다가 346년에 전연에게 망한다.

백제가 분서왕 7년(304년)에 부여와 낙랑을 공격하는 대사건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자.

북부여가 망한 후 동부여는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하는데, 윤내현은 고조선이 멸망한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동부여가 사라진 494년까지를 열국 시대라고 부른다.

열국 시대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를 거쳐, 가야가 신라에 망한 56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를 '삼국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 윤내현의 주장이다.

윤내현의 주장은 주류사학계가 우리 역사의 흐름을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국시대라고 보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윤내현은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보지만 위만조선은 우리 역사로 보지 않고 있으며, 한사군 역시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우리 역사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열국시대에는 요하 동쪽에 있었던 고조선의 많은 거수국들 이를테면 비류•행인•해마•개마•구다•갈사•조나•주나 등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런 나라들이 동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부여는 고조선의 뒤를 이어 고조선 연맹체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고, 북만주 지역을 하나로 만들어 지배했으며, 고구려와 백제 역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그 영향이 대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조선의 고토 회복을 주장하면서 '다물'을 국시로 삼았으므로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