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문명이 분열을 거듭하는 것은 마고성의 부도를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조선 단군의 태자 부루가 순임금, 우에게 오행치수법 전해

순임금이 단군을 배반하고 요임금에게 투항, 부도에서 이탈

원래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제후

우가 수륙의 길을 차단하여

마고성의 전통인 부도와 연락 끊고 왕래를 못하게 막아

하나라와 은나라가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는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

 

▲ 만주 집안현에 있는 장군총. 이런 적석총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그리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모두 마고성의 소(巢)가 원형일 것이라는 주장이다(서기1912~1913년 촬영, 왼쪽이 장군총, 오른쪽이 배총). 자료: 한민족대백과사전
▲ 만주 집안현에 있는 장군총. 이런 적석총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그리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모두 마고성의 소(巢)가 원형일 것이라는 주장이다(서기1912~1913년 촬영, 왼쪽이 장군총, 오른쪽이 배총). 자료: 한민족대백과사전

 

중국 고대전설 4-10(우임금과 곤)

우리나라 옛날 책에도 우임금 이야기가 나온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기록하길,

'재위 67년 갑술년(서기전 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해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을 만나게 하셨다.

태자가 오행치수의 법을 전하고 국경을 따져 확정하니 유주와 영주가 우리에게 귀속되었다.

회대(淮岱) 지역의 제후를 정하고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되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

위 기록에 대한 해설에는, '우사공(虞司空)에 대해 김은수는 사공 관직에 있던 우(禹)를 가리킨다고 했다. 안경전은 우(虞)는 순임금을 가리키고 사공은 순임금이 파견한 우(禹)를 가리킨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대산(岱山)은 태산의 별칭이고 우순은 순임금의 이름이다. 우순(虞舜)에게 분조를 맡겼다는 것은 순임금이 단군의 제후였다는 의미가 된다'는 설명도 있다.

그런데 신라인 박제상이 썼다는 <부도지>에는 우(禹)에 관해서 <환단고기>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부도지>는 순의 아버지 유호씨가 단군의 신하로서, 순과 함께 환부와 권사 등 백여 인을 인솔하고 잘못을 깨우치러 요를 찾아갔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요가 두 딸로 순을 유혹하니 순은 두 딸을 몰래 아내로 삼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는 것이다.

유호씨는 둘째 아들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요의 무리를 치게 하니, 요는 갇혀 있던 중에 죽고, 순은 창오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요의 무리 우가 순에게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순을 추격하여 죽여버렸고, 순의 두 처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부도지>의 기록을 좀더 따라가보자.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에 단을 설치하였다. 서남의 종족들을 정벌하여 제후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祭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매우 갑작스러웠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중략)

유호씨가 서방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의 종족들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을 이루었다.(중략 - 계속해서 요가 부도의 이치를 버리고 오행의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유호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모든 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자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회계산)의 진지에서 죽었다.(중략)

우의 아들 계(啓)가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으로 진격하여 오니,(중략) 그러나 하나라 군사는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 번도 전적을 드높히지 못하였다.(중략)

유호씨가 하나라 백성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의 종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이 자연히 없어졌다.(중략)

이로부터 천산 남쪽 태원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백성은 장님이 되어 암흑이 겹쳤다.(중략)

그러한 까닭으로 하나라와 은나라가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무리를 이끌고 월식•생성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백소씨와 흑소씨가 사는 곳이었고, 백소씨와 흑소씨의 후예가 오히려 보금자리(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높은 탑과 계단을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지구라트나 피라미드는 마고성의 소(巢)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되겠다.

중국의 기록과 우리 옛 기록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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