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조선은 낯설은 중국 법률을 들여와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귀양은 원말은 귀향(歸鄕)이며

고려ㆍ조선 시대에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 데서 비롯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따라 일단 곤장 100대 맞고 출발

귀양 생활 중 의식주 등 모든 것은 죄수 본인이 부담해

돈 있는 자는 속죄금을 내고 풀려나 귀양 가는 예 없어

대역죄인에게는 높은 울타리를 쳐서 밖이 안 보이게 해

 

▲ 이성계의 조선에서는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면서 귀양을 보내는 경우가 흔하였다(편집인 주). 자료: 전집현
▲ 이성계의 조선에서는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면서 귀양을 보내는 경우가 흔하였다(편집인 주). 자료: 전집현

조선시대 형벌 중 곤장 100대 처맞고 三水甲山으로 3000리 길을 떠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죽는 것이 최악의 귀양 생활이 있었다.

1. 곤장 100대 맞고 머나먼 길을 몸으로 때우다

귀양은 원말은 귀향(歸鄕)으로 고려ㆍ조선 시대에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발음이 변하면서 '귀양'이 됐다고 한다.

귀양은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의 일종이다.

일단 조선 시대 형법의 기본으로 삼는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따라 일단 곤장 100대를 치는데 이때 귀양도 못가고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속전(贖錢 :돈을 내서 장형을 면제받은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관료 정도 되면 장형을 받고 귀양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죗값에 따라서 2000리~3000리까지 가게 되는데

( 약 785km~1178km) 이 역시 대명률을 가져왔다. 근데 조선 영토상 도성에서부터 2천 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는 게 불가능했기 통상적으로 900리 정도만 이동했다고 한다.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서 편하게 가는 일은 없고, 대부분 걸어서 가게 된다. 돈 있는 대감은 나귀를 타고 가기도 했다.

귀양을 가면서 식비, 의복비 등 개인 편의를 위한 모든 부대비용은 죄수 본인이 부담했다. 유배지 도착까지 엄청 시간이 걸려 그 비용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기에 대개 몸으로 때웠다.

2. 귀양지 중 으뜸은 개마고원의 삼수갑산(三水甲山)

귀양지 자체도 사람이 살기 힘들고 험준한 지역을 고르게 된다.

조선 초기에 가장 유명한 유배지는 함경도에 있는 삼수군과 갑산군이었다. (삼수갑산 三水甲山이 여기서 나왔다). 개마고원 중심부에 위치하는 데 매우 춥고 경작지도 적어서 중죄인을 귀양 보내는 적소로 뽑혔다.

정약용이 간 전라도 강진도 오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흑산도(정약전), 제주도(추사 김정희, 송시열) 같은 섬이 유명해진다.

뱃길이 험했고, 조난 사고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귀양지 도착 전에 죽기도 했다.

▲ 최근 경기도 이재명 지사와 야당, 국민의힘 간의 설전이 격화되고 있다. 이재명 지사 측에서 국민의힘의 김기현 의원에게 남극에 귀양을 보내겠다는 뜻으로 '위안리치'라는 말을 사용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편집인 주). 자료: 전집현
▲ 최근 경기도 이재명 지사와 야당, 국민의힘 간의 설전이 격화되고 있다. 이재명 지사 측에서 국민의힘의 김기현 의원에게 남극에 귀양을 보내겠다는 뜻으로 '위안리치'라는 말을 사용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편집인 주). 자료: 전집현

3. 귀양 생활 중 최악은 위리안치(圍籬安置)*

* 울타리를 에워싼 후 안전하게 둔다

귀양 온 사람은 자급자족조차 어려운 험악한 환경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로 연명하거나 의식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그래도 위리안치를 피하면 다행이었다. 위리안치는 주로 대역죄인이 받았다. 보통은 유배지가 정해지면 그 지역에서는 활동할 수 있는데 위리안치는 특정한 집을 정하고 높게 울타리(탱자나무)를 쌓은 다음에 그 안에서만 사는 것이었다

울타리 높이가 약 5m~9m이기 때문에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4. 정약용, 윤선도, 징하게 귀양 당하다

귀양은 기본적으로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언제 풀려날지가 아득하였다.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귀양(전라도 강진) 당하기도 하고, 윤선도처럼 4번에 걸쳐 무려 25년을 귀양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함경도 경원, 부산 기장, 경북 영덕, 함경도 삼수, 전라도 광양).

그래도 이들은 나름대로 학문을 연구하고 지역의 지식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경우도 많다. 정약용도 귀양살이 도중 목민심서까지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정약전도 자산어보를 귀양 생활 중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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