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받지 않는 절대권력도 견제가 있어야 나라가 오래간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서태후, 어린 황제 2명 섭정하며 48년 철권통치

사치와 향락으로 대청제국 국정방치 멸망 가속

향락과 사치의 극치, 이화원 만들어 열강 침략 초래

무술정변, 의화단은 서태후가 권력유지를 위해 배후 조종

 

▲  청나라를 48년간 지배하며 밀려오는 서양열강에 대비하지 않고 멸망으로 이끈 서태후
▲ 청나라를 48년간 지배하며 밀려오는 서양열강에 대비하지 않고 멸망으로 이끈 서태후

 

< 서태후 : 부귀영화와 권력만 누리고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든 여인>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청나라 말기,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정계에서 태후로서 황제 2명의 섭정을 하면서 48년을 철권통치했던 여인이다.

* 10대 동치제, 11대 광서제

하나 그녀는 평생 개인적 영화를 위해서만 권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청 제국의 명을 재촉했다.

그녀의 유일한 업적이라면 세계적인 황실 정원인 이화원(頤和園)을 남겨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게 하는 등 오늘날 중국의 관광수입과 산 역사의 장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1. 서구열강과 일본의 위협에 방비할 생각은 안 하고 국가 예산을 탕진하며 이화원을 만들다.

베이징의 이화원은 중국인이나 중국을 찾은 관광객이 꼭 둘러보는 최고의 정원으로 명소가 되었다. 한때 황제만 사용하던 전용공간이었다.

이화원은 원래 1750년 청나라 건륭제 (1711~1799년)가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쓴 청의원

(淸漪園)이었다.

1860년 제2 아편전쟁 때 서양군대에 의해 보물은 약탈당하고 목조건물은 전소되어 폐허가 되었다.

청의원을 재보수·중건한 사람은 청 말기 실권자인 서태후였다. 1894년 갑오년이 서태후의 환갑이었는데, 6년 전부터 성대한 연회를 할 장소로 폐허 위에 새롭게 정원공사를 했다. 명칭도 청의원에서 이화원으로 개칭했다.

이화원을 짓는데 무려 국가 1년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이나 소모했다. 서구열강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청을 지키려면 모두 군사력에 집중 투입해 군을 정예화하고 증강해야 했는데, 서태후는 그러지 않았다.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는 바다처럼 넓어서 그 가운데 풍치를 위해 섬을 조성했고 호수를 판 흙으로 높이 60m의 만수산을 만들었다.

그 만수산 기슭 곳곳의 궁전과 누각에서 1년 내내 잔치를 벌였다.

1894년 서태후가 환갑인 해, 청일전쟁이 터졌고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대패했다.

청은 일본의 강화교섭에 응하고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전쟁 벌금은 물론이며 휘하에 두었던 조선의 종주권마저 내놓았다.

아무튼 그녀는 18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2. 출신은 비천했으나 황제를 갈아치우며 섭정을 하면서 권력 남용

(1) 황제의 후궁이 되어 옥동자를 낳고 귀비로 승진

서태후의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심지어는 출신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안후이성 우후설,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치설의 3가지 출신설이 있다.

그녀는 17살에 수녀로 선발되어 청의 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총명하여 고전에 능통하고 서화와 노래를 잘 하였는데 궁의 이수원에서 산시성 민요를 부르며 함풍제를 유혹, 귀인의 직급을 받고 아들을 낳는다.

함풍제는 황후와 이귀비 등 후궁들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러니 태자를 낳은 그녀는 낮은 서열의 후궁에서 귀비에 올랐다.

(2) 아들이 황제(동치제)가 되자 섭정

1861년 함풍제가 승하하자 6살인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로 즉위했다.

두 어머니의 섭정과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의정왕으로서 정치를 보좌하였다.

생모인 그녀는 성모황태후, 함풍제의 정실황후는 모후황태후로 칭해졌는데,

성모황태후는 서쪽의 평안궁에 처소가 있었고 모후황태후는 동쪽의 수리전에서 살았다.

서태후(西太后), 동태후(東太后)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같은 태후라 할지라도 모후 황태후인 동태후가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 또한 더 높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대부분 권력욕이 있었던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두 태후 간의 알력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알력다툼은 자그마치 20년을 갔다.

서태후는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워하고 역정을 내는 것도 모자라 황제의 황후 처소 출입마저 막았다.

이래저래 시름에 잠긴 동치제를 즐겁게 해줄 요량으로 신하가 유곽을 소개했다.

재미를 느낀 동치제는 자주 유곽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매독에 걸린 것을 서태후가 종기라고 하며 종기에 대해 치료만 하다 일어나지 못하고 1875년 세상을 떴다.

동치제의 나이 겨우 19살이었으며 황후가 임신 중이었음에도 제위 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쫓아냈다.

(3) 조카를 황제(광서제)로 세우다

그리고 자기 여동생과 시숙 사이에서 난 4살밖에 안 된 조카(광서제)를 양자로 들여 제위를 물려주었다. 섭정이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

동태후가 1881년 어느 날 계단에서 내려가다가 뇌진탕으로 사망하면서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서제도 성년이 되어 한 여인을 마음속에 품었다. 그러나 광서제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서태후는 자기의 질녀를 황후자리에 앉혔다.

광서제가 16세부터 친정을 하자 서태후는 이화원으로 나앉았으나 실권을 넘겨 주지 않았다. 황제를 직접 불러 지시를 하였다고도 한다.

(4) 환갑잔치는 이화원에서 흥겹게

1894년 갑오년은 서태후의 환갑이었다. 이를 대비해 6년 전부터 성대한 연회를 할 장소로 청의원의 폐허 위에 새롭게 정원공사를 했다. 한해 국가 예산의 30%를 써서 이화원이 탄생했다.

그 무렵 청일전쟁이 터졌다. 물론 청나라의 부패한 정부를 얕잡아보고 일본이 침략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대패했다.

(5) 만신창이 되어 무너진 제국. 그녀가 재촉했다

1898년 광서제가 서태후의 간섭에 질려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와 공모,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를 꾀하려 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하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이 여세를 몰아 서태후는 의화단(義和團)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용해 유럽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8개국 연합국의 침입을 초래, 서태후는 결국 서안(西安)으로 피신했다.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그녀도 만년에 이화원에 돌아와 진보적 개혁과 입헌준비, 교육진흥 등 신정을 펼치려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굴욕적 외교로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10년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누군가 보낸 독약을 먹고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그 즉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농제 푸이였다.

그러나 생일날 과식하고 이질로 고생하던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생을 마쳤다. 향년 72세.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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