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이 장악한 대학교, 박물관, 각종 연구소를 혁파해야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

 

언론매체들 식민고고학과 식민사학이 준 것 무비판적 보도

한겨레 신문 노형석 기자, 경주 월성 축조 연대 깎아내리기

삼국사기 월성 축조 기록 무시, 제멋대로 측정하여 왜곡 보도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그대로 되풀이

 

▲ 경북대학 명예교수, 주보돈씨가 경주 월성 발굴현장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식민사관에 따라 신라 초기 역사 3백여년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신라는 서기전 58년에 개국했다고 분명히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음에도 4세기경 까지도 국가가 아니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자료: 와이티엔 발췌
▲ 경북대학 명예교수, 주보돈씨가 경주 월성 발굴현장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식민사관에 따라 신라 초기 역사 3백여년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신라는 서기전 58년에 개국했다고 분명히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음에도 4세기경 까지도 국가가 아니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자료: 와이티엔 발췌

지난 9월 7일 경주 월성을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연구소)는 무덤에서 사람의 뼈를 발견하였다. 연구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인신공희’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언론에 공개하였다. 언론매체들은 일제히 연구소 측에서 내놓은 자료를 앵무새처럼 대동소이하게 보도하였다.

문제는 이 발굴단이 이 무덤의 연대를 서기 1600년대라고 하였고 월성도 서기 4세기 초 중반에 축조하였다고 역사사기극을 벌였다는 점이다.

특히 진보의 탈을 쓰고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첨병 역할을 하는 한겨레 신문은 노형석 기자를 통해서 상세하게 경주 월성이 왜 서기 4세기 초중반에 쌓은 것인지 설명하였다.

연구소 측에서 내놓은 것을 충실하게 알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보도를 보자

“조사단은 인신공희의 흔적과 더불어 월성 성벽의 축조 연대와 축성 방식도 최초로 밝혀냈다. 기존 성벽이 <삼국사기> 등 역사 기록에 나온 2세기보다 250년 이상 후대인 4세기 초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0~70년이 지난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 분석에 바탕해 서성벽의 토목 기술과 축조 공정 세부를 파악한 결과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옛 사서 기록을 보면, 월성은 고신라 초기인 파사왕 22년(101년)에 쌓은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사서의 축성 기록이 실제 축조 연대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기일 것이라며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사서의 월성 관련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조사 결과가 공개되면서 논란이 사실상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노 기자는 경주 월성의 축조 연대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까지 버젓이 언급하며 월성의 축조 연대를 5세까지 끌어내리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추종한 결과다.

그러면서 무조건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가속질량분석기(AMS) 연대 분석에 바탕해 서성벽의 토목 기술과 축조 공정 세부를 파악한 결과”라고 한다.

근거를 보면 첫째,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 둘째, ‘가속질량분석기 연대 분석’이다. 나머지는 ‘토목 기술과 축조 공정 세부 파악’이다.

이 중에서 가속질량분석기 연대 분석 외에는 주관적인 해석이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라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은 것은 가속질량분석기로 연대를 분석하였다는 것인데, 이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식민사학과 식민고고학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노형석 기자의 보도 속에서도 이들이 얼마나 미리 주관적 예단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객관적인 결과를 담보하는 수단을 통해 측정하기도 전에 오래전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 월성 축조 연대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사서의 축성 기록이 실제 축조 연대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기일 것이라며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상당수 학자들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식민사학의 소굴로 알려진 한국고대사학회의 구성원일 가능성 짙다.

이 집단은 서기 2016~2017년에 걸쳐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시민을 상대로 한국 고대사 시민강좌 및 신라사 강좌를 열어 시민에게 식민사관을 전파한 바 있다.

이들이 얼마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매국을 하는지는 엄연히 구체적인 전후 사정까지 담아 월성의 축조 연대를 파사이사금 22년 서기 101년이라고 밝히고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믿을 수 없다는 예단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측정하는 수단도 자신들이 원하는 연대가 나오게 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경주 월성 터를 발굴하였다. 월성의 축조연대가 논쟁이 됐는데 삼국사기는 서기101년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믿을 없다며 측정하였는데 서기 4세기 중반으로 나왔다고 한다. 서기101년 축조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자료: 제이티비씨 발췌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경주 월성 터를 발굴하였다. 월성의 축조연대가 논쟁이 됐는데 삼국사기는 서기101년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믿을 없다며 측정해 보니 서기 4세기 중반으로 나왔다고 한다. 서기101년 축조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자료: 제이티비씨 발췌

이 발굴 보도 중 JTBC에서는 “전문가들은 고려 때 문헌보다 연대 분석의 정확성을 더 높게 보고 있습니다.” 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고려 때 문헌’은 <삼국사기>를 말한다. 신라 역사를 담은 <삼국사기>가 신라 시기가 아닌 고려 때 나온 것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신라 당대가 아닌 한참 뒤의 고려 때 쓴 것이라서 월성 축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들의 시각이고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다.

일제는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야마토왜가 점령하고 식민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일본서기>에 기초하여 주장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인정하면 <일본서기>가 설자리가 없고 임나일본부설도 무너진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가짜로 몰았다. 그 논리 중의 하나가 <삼국사기>가 <일본서기>보다 한참 늦게 나왔다는 것이다. 삼국의 역사를 삼국 당대의 나라가 쓰지 않고 한참 뒤인 고려가 썼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월성 축조 기록을 부정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 초기기록 역사인 101년에 월성을 쌓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고 실제 측정한 것을 사실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경상남북도 전라도 등지의 삼국시대 관련 유물, 유적은 절대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5~6세기 안에서 머문다. 이것은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조선총독부 후예 일본 극우파 학자들이 건너와 고고 유물 발굴에 참여하면서 정해 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월성 축조 연대 계산도 이것에 짜 맞춰낸 혐의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경상남북도 및 전라도 등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과 무덤 유적을 가장 신빙성 있고 객관성을 담보하는 탄소측정법으로 연대를 계산해 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에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계산하게 되면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거나 서기전으로까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탄소를 얼마든지 채취할 수 있는 목간이 수도 없이 발굴됐는데도 탄소측정으로 연대를 밝혔다는 말은 없다.

더 기가 막힐 일은 고고학 유물 발굴임에도 역사학을 전공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가 발굴 현장에 등장하여 축조 연대를 확정하였다는 점이다.

노형석 기자에 따르면 주보돈 명예교수는 “신라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4~5세기 경주 일대의 소국이던 사로국이 주변 지역을 통합해 고대 국가 신라국으로 새롭게 출범하게 된 시대적 변화를 이번에 발굴된 월성 서성벽의 유적 양상이 그대로 보여준다.”라고 하였다.

주보돈 명예교수는 4~5세기까지 신라는 없었고 사로국만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신라가 4세기 이후에나 생겨났다는 얘기다. 그는 지난 서기 2017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신라사 강연을 시민을 상대로 하면서 신라가 4세기경에나 생겼다고 한 바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명백히 신라가 서기전 58년에 개국했다고 나오는데도 이를 부정하였다. 4세기 이전의 역사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가 내놓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그대로 숭배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노형석 기자는 식민사관에 충실하여 그냥 신라라고 하지 않고 서기 101년 월성 축조 시기의 신라를 ‘고’신라라고 하고 있다. 이는 식민고고학의 대부로 알려진 서울대 고 김원룡 교수가 창안해 낸 ‘원삼국 시대’ 용어와 같은 선상에 있는 말이다.

‘고’신라, 원삼국이라는 용어에는 삼국의 초기역사를 믿을 수 없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식민사관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믿지 않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월성에 관한 기록은 어떠한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2년 서기 101년 조에, “2월 궁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은 월성으로 이주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월에 궁성을 쌓았고 그해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주하기 전에 다른 궁성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신라본기에는 기록의 신빙성을 나타내는 천문기록이 서기전부터 나오고 있다. KIST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삼국사기>의 일식 천문기록은 중국과 비교해 실현율이 월등하게 높게 나왔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천문기록은 실현율이 아주 낮아 천문기록의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해 보니 중국은 물론 일본보다 <삼국사기> 기록이 신빙성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국내 식민사학과 식민고고학은 조선총독부와 그들의 후예인 일본 극우파의 교시에 따라 무시하고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도발하고 있는 일본 극우파의 입맛대로 월성 축조 연대를 2백 년 이상 깎아내렸다.

이것이 21세기 문명사회라는 한국의 실태다. 더구나 가야사와 함께 국민 세금으로 일본에 역사를 팔아먹는 범죄행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학계도 광복군의 민족자주 역사학이 거꾸로 청산되고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악질 친일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 등이 장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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