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를 이은 백제는 닭의 알 같은 천기를 품고 탄생하였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는 개국신화 존재

백제만 개국신화 부존재, 부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

후백제 견훤의 탄생설화는 후백제 개국신화라 할 수 있어

호랑이 젖을 먹은 견훤  설화, 지렁이 설화 두개 전해져

 

▲ 단군조선이 문을 닫은 이후 열국들이 이동한 길
▲ 단군조선이 문을 닫은 이후 열국들이 이동한 길

 

백제 건국신화 1

백제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와 같은 건국신화가 없다.

동부여의 경우도 건국신화 비슷한 설화가 있고 또 금와왕 신화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백제는 건국신화가 없다.

백제가 건국되고 900년이나 지난 뒤에 세워진 후백제에도 견훤의 탄생신화가 있는데, 백제는 왜 건국신화가 없을까?

어쩔 수 없이 후백제 견훤의 탄생신화를 먼저 이야기하자.

견훤(867~936)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본디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씨라 고쳤고, 아버지는 아자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밥을 나르면서 젖먹이인 견훤을 강보에 쌓아 숲속에 뉘어 놓았는데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경상도 상주가 아니라 전라도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을 기록해 놓았다.

- <고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광주 북촌에 사는 한 부자가 딸을 하나 두었는데 태도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저의 침실에 와서 관계를 합니다"하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했다.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은 북쪽 담장 아래에서 찾았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 임신하게 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

경복 원년 임자(892)에 이르러 왕이라 칭하고 완산군에 도읍을 세워 43년 간을 다스렸다.

왕이 된 사람의 탄생설화치고는 이야기가 참으로 해괴하다.

왕이 되신 분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니, 조롱하려고 만들어낸 악의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가 어떤 성격의 책인지 알 수 없으나, 견훤의 탄생설화를 보면 후백제에 대해 매우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탄생했다는 광주 북촌에는 지금도 '용'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9개나 있다.

용이 태어났다는 생룡동을 비롯하여 오룡동 용강동 용두동 용봉동 용전동 등등.

그러니까 견훤의 탄생설화가 깃든 광주 북촌에서는 견훤이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다는 말이다.

훨씬 후대에 세워진 후백제나 고려에도 건국신화가 있는데, 왜 백제에는 건국신화가 없는 것일까?

전호태는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가 부여를 잇는 나라'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건국신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백제는 실제로 온조왕 때부터 시조묘인 동명묘를 만들었고, 계속하여 동명묘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왜 백제는 고구려와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그토록 치열하게 다투었을까?

무엇 때문에 고구려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을 자신들의 시조인 주몽에게 그대로 붙여 '동명성왕'으로 불렀을까?

부여는 도대체 어떤 나라였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자신들에게 부여의 정통성이 있다고 다투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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