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로 가야지명을 새기는 것은 일본에 역사를 팔아먹는 것이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가야는 토착세력, 유라시아 흉노족, 인도 집단이 세운 복합 문명

대한해협을 중심으로 열도와 우리의 내륙을 잇는 중심국가로 군림

서기전 1세기에 이미 철을 생산하는 발달 된 철기 문화시대 진입

 

▲ 철의 제국 가야는 서기전 1세기에 이미 철기생산능력을 갖춘 유라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 철의 제국 가야는 서기전 1세기에 이미 철기생산능력을 갖춘 유라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가야 건국신화 7

김종성은 김수로 집단이 가공할 세력이었기 때문에 토착세력과 타협하는 과정이 매우 고압적이었다고 보았다.

자신을 맞이하려면 춤추면서 구지가를 부르라고 명령조로 말하고, 9간이 왕후를 추천하려 하자 자신은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며 9간 세력의 왕후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9간의 통치지역을 새롭게 6개 지역으로 재편하고 9간의 명칭도 촌스럽다고 하여 모두 새로 바꾸어 버렸다.

이런 고압적인 자세는 한나라의 권력 중심에서 싸워본 경험과 월등한 철제 무기의 위력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김종성은 '철의 제국 가야'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문명의 용광로였다고 한다.

매우 새로운 주장이므로 그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가야는 유라시아 문명의 용광로라 할 수 있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있던 토착세력,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있었던 흉노족 일파, 유라시아 대륙 남부에 있었던 인도인 집단이 가야 문명 건설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세력이 결집하는데 매우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가야 문명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가야에서는 여러 문명이 비교적 균등하게 융합될 수 있었고, 가야 문명은 출발부터 다양성을 품게 되었다.

가야가 야마대국이라는 분신을 일본 규슈에 세웠다는 설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김종성은 가야를 최초•최후의 '대한해협 중심국가'라고 본다.

가야가 철을 매개로 일본과 무역을 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가야를 '대한해협 중심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은 대한해협 양쪽의 역량을 동원하여 자국의 대륙정책을 수행했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대한해협에 인접한 국가 중에서 가야처럼 대한해협 양안의 자원을 통합적으로 동원한 제국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야 멸망 이후 일본은 대륙과의 연계를 고민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15세기에 바닷길이 개척되기 전까지 일본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없었고, 왜구가 많아진 것도 한반도 및 대륙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야 멸망 이후 일본열도는 살아남기 위해 대륙과의 교류를 희망했지만, 한반도의 방해로 대부분 좌절되고 말았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만성적인 대립 관계로 악화한 데는 두 지역의 평화로운 매개자였던 가야의 멸망이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야 멸망 후에 유민들이 일본열도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야가 대한해협 중심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라시아적 융합을 통해 형성된 가야 문명은 대한해협 중심국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열도에 자신의 문화적 분신을 남길 수 있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가야를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등한 국가로 취급하지도 않았는데, 김종성은 가야를 유라시아 문명의 용광로이자 '대한해협 중심국가'로까지 바라보고 있다.

윤내현은 <한국 열국사 연구>에서 김수로는 토착인 일 것으로 보았다.

또한, 50기가 넘는 공동묘역인 '다호리 유적'의 유물로 보아 '서기전 1세기' 무렵에 이미 매우 발달한 철기문화 시대에 진입해 있었다고 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다섯 자루의 붓은 중국 한나라에서 사용했던 것들과 같은 것으로, 교역에 필요한 서류들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란다.

따라서 가야 지역은 가야가 건국되기 훨씬 전 고조선 말기인 서기전 1세기 무렵에 이미 발달한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고, 고조선이 붕괴한 뒤 한(韓)시대로 이어졌으며 이를 이어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것이 윤내현의 견해다(가야사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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