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반민족 세력 청산에는 시효란 있을 수 없다.

 

글: 송필경(대구범어치과 원장)

 

뼈 속까지 왜구이고 싶어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암흑의 시대

연속되는 긴급조치로 대학의 여유와 낭만은 잠시 휴교 밥 먹듯

역사의식을 깨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인생의 경전이 돼

20세기 현대사가 꽉 막혀있는 것은 일제 식민지 역사 때문

일제의 고문으로 죽은 이육사, 해방공간에서 살해된 여운형 등

일제와 이를 이어받은 맥아더 미국군 정부의 점령정책 때문임

전 국민의힘 소속 한 국회의원은 일본정부가

문재인 정권교체를 원하니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게

여전히 친일파가 지배하는 세상,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나타내

 

▲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치하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히고 박 정권에 반대되는 글을 썼다고 여러차례 구속 수감했다.
▲ 박정희 정권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를  친일 반민족 행위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치하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히고 박 정권에 반대되는 글을 썼다고 여러차례 구속 수감했다.

 

새로운 리더십-1

현대사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실을 말하려는 자세

나는 1968년 초부터 1974년 초까지 6년 동안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가장 흥미를 느낀 과목은 역사였다. 국사는 물론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까지 필수였다.

나는 197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의 첫 봄은 고교 때까지 느끼지 못한 해방감을 만끽했기에 화사하고 따뜻하고 즐거웠다. 그런 봄을 대학에서 다시는 맞이하지 못했다.

그 때는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직전이어서 박정희는 초조했다. 남베트남처럼 독재를 하던 박정희는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4월 30일, 남베트남은 기어코 패망하고 베트남은 민족통일을 성취했다. 박정희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는 유신 시대 악법 가운데 가장 악랄했던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용수철은 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힘이 더욱 강해지는 성질이 있다. 악법으로 아무리 눌러도 젊은이들은 용수철처럼 본능적으로 반발했다. 긴급조치의 폭력으로는 저항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유신의 종말을 향해 박정희는 발걸음을 재촉한 셈이었다.

대학의 낭만적인 분위기도 종말을 맞았다. 아직까지 그때와 같은 낭만은 대학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대학생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낭만 말이다.

대학은 그 후 휴교를 밥 먹듯이 했다. 세상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나는 대학 생활에서 시간을 많이 얻었다. 이를 테면 좋은 선배와 친구를 만날 기회가 많았고, 책을 가까이 둘 수 있었다.

내 의식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이영희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그때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아직까지 내 인생의 경전(經典)이다. 이 경전이 내 의식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하게 했다.

나는 이때부터 역사를 내 경전이 가르쳐 준 방식으로 해석했다. 경전이 역사에서 찾으라고 한 요구는 한 마디로 하면 ‘진실’이었다.

그 뒤 우리 역사를 ‘태종태세문단세’로 암기하는 고교식 버릇을 버렸다.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크로체(Benedetto Croce;1866-1952)란 이탈리아 역사가를 만났다. 휴매니스트, 철학자, 문예비평가, 그리고 정치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반파시즘 운동으로 이탈리아의 저항정신을 상징했다. 크로체는 역사가로써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

내 역사의식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이 심오한 문장을 해석하는 일은 내 능력 밖이므로 도올 선생의 힘을 빌리겠다.

『이 말을 더 정확히 번역한다면 ‘모든 역사는 지금의 역사이다.’라는 뜻이 되겠지만, ‘지금’이라는 시점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므로 지금의 가까운 집합으로서의 ‘현대’를 방편적으로 상정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진행시켜 보자!

모든 역사 즉 모든 과거의 사실, 다시 말해서 비현재적 사실(noncontemporary fact)은 마치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한 지금의 나와 무관한 사건 같지만, 모든 역사는 직접적 대화(narrative)를 통하여 인식 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문헌(documents)를 통하여 판단되고 해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과 해석이 일어나는 시점은 끊임없이 “나의 지금”이라는 조건을 떠나지 않는다.

즉 과거의 사실은 현재적 삶의 관심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관심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심에 대답하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적 삶의 관심과 융합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모르고서, 즉 지금의 나라는 현존재의 역사를 모르고서 과거를 안다는 개소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현존재의 역사를 우리는 ‘현대사’라고 부른다. 나의 실존과 가장 직접적으로 가까이 얽혀 있는 역사라는 뜻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라는 말은 모든 역사는 현대사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말로 뒤바꿔 진다.’

우리가 배운 역사책은 대부분 구한말에서 끝나버렸고 20세기는 빠져버렸다.

나는 도무지 20세기 역사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 역사라고 하면 ‘똥도 싸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 사모관대에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거룩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며, 도무지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의 이야기들은 ‘역사’라는 이름을 지어줘서는 안 되는 그 무엇, 20세기 ‘역사’는 무슨 몇몇의 저널리스트에게 독점되어 있거나 무슨 연구소의 서류화일로 있는 것,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단편적으로 지껄이는 가십으로 인식되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나와 얽힌 가까운 이야기들은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기에는 너무도 일상적인 하찮은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항우나 유방, 혹은 유현덕이나 조조의 이야기에는 유창한 구라를 떠벌이면서도 20세기 중국사를 말해 보라면 정말 내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면서 구라를 필 사람이 몇 사람이 되겠는가. 우리는 20세기 일본의 역사도 잘 모른다.

‘20세기 역사!’하면 우리의 관념은 캄캄한 오리무중을 헤맬 뿐이다.

왜 우리는 이러한 무지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가? 왜 현대사로부터 모든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그 가치의 장을 우리는 잃어버렸는가? 나의 존재 가치를 구성하고 현존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가치관 정립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말하는 역사가 이대로 좋은가? 이 왜에 대한 대답은 추상적 언어로 얼버무려질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대답은 명약관화한 한마디다! 바로 “일제식민지사”라는 놈이 우리 20세기 시공 속에 꽉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일제식민지사가 이다지도 문제가 되는가? 그 대답 또한 명약관화한 한마디다!

그 역사에는 가깝게 우리 엄마 아버지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가 청산해야 할, 반칙과 특혜와 특권으로 쌓인 적폐는 친일 세력의 아들 딸들이 휘두르는 기득권이다. 불과 며칠 전 국민의힘 소속 한 국회의원은 일본정부가 문재인 정권교체를 원하니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망언이 버젓한 게 우리 현실이다.

친일의 역사는 크로체의 말을 빌리면 바로 지금의 역사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명확한 예다.

“반드시 기억하라. 하나의 선은 다른 선과 관계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색체 혁명으로 20세기 현대 미술의 시초를 연 야수파 창시자인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미술을 떠나 역사에 이 명언을 적용하면 이렇다. 한 시대의 역사는 한 시대에서만 이룬 것이 아니다. 그 전의 시대와 관계에서 이어졌다는 성찰이다. 과거의 사실은 지금의 내 삶(실존)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이다.

나는 지금의 역사와 선이 바로 맞닿아 있는, 다시 말해 지금의 역사와 다름없는 ‘일제식민지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식민지는 무수한 애국지사와 역적 이완용 한 사람과 대치한 구도가 아니었다. 18세기 중후반에 있었던 일본의 진보는 20세기에 들어 한국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제 식민지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유혹하거나 변절시켰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일제에 부역했다.

유혹에 변절하지 않고 꿋꿋했던 사람은 우리가 인정하기 싫지만 소수였다.

그 귀한 인물 중에 안동 출신 위대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가 있었다. 일본에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40년이란 짧은 생애에 17번이나 투옥 당했다. 1944년에 이국 땅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는 조국의 해방을 목 놓아 기다리면서 웅혼한 시 <광야>를 남겼다. 이 짧은 시 한 편은 이광수니 서정주니 하는 매국 문인들 남긴 일제 강점기의 그 모든 글을 압도하고 남는다.

『…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렇게 고대했던 해방은 이육사 사후 1년 7개월 뒤인 1945년 8월에 찾아왔다.

해방 정국에는 이육사처럼 조국 해방에 열정을 지닌 사람이 많았다. 여운형 같은 광복을 준비한 사람들은 8월 15일 이후 즉시 ‘건국준비위워회(건준)’로 시작하여 9월에는 지방으로 광범위하게 정착하려 했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는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할 때 미군이 직접 남한을 통치하겠다는 미군정 포고령을 선포했다.

“내(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은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건준’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무시하면서 남한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부정했다.

대신 미군정은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인사들을 대거 고용해서 미군정에 편입했다.

친일 친미 반민족 세력은 미군정을 따르지 않는 여운형과 같은 자주독립건국지사를 암살했다.

자, 이런 미군정의 역할에 어떤 정당성이 있었는가?

철저히 단죄당해야 할 친일파가 미군정의 등에 올라타고 오히려 항일 건국 지사를 모질게 탄압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오늘날의 모든 갈등은 이때 시작했고, 이때 일어난 갈등의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 사회는 아직 한 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7월 1일, 대선 후보 이재명은 출마 선언하고 자신의 고향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관’을 찾았다.

이 문학관을 지키는 이육사의 딸 이옥비씨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서 사실은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은가?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이 청산된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군 점령군들과 협조관계를 이뤄서 정부수립에 깊이 관여했고, 그들이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거두절미하고 ‘미군은 점령군이다.’라는 말이 언론을 타자, 친일파 후손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구차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왁자지껄 색깔론 돌팔매질을 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조차 “발언의 파장을 생각해야”한다고 비판했다.

70년 전의 역사를 거론하자 비루한 자들은 마치 오늘의 일인 양 부산떨고 있다. 이런 행동은 그들이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점령한다(occupy)’란 말은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했다.

이 말을 우리가 거론한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 과거를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진실에 가까이다가 가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케케묵은 사대주의 사고에 아직도 절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현대사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실을 말하려는 자세, 다음 정부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의 첫 번째 덕목으로 나는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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