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 신화 인도풍습이었다.

 

글: 김상윤(광주마당고문)

김산호,

'가야 기원지는 북인도 불교 문화권

코살제국 피해 양자강 상류 보주 정착

가야인 2차 망명 남해안 금주 정착

망명조건 아유타 공주 허황옥 바침

▲ 가야와 허황옥은 북인도의 불교국가 출신설이 있다. 

 

 

가야 건국신화 4-4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가야 왕실이 만민평등을 선언하자, 코살라 제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가야를 멸망시켰다고 김산호는 설명을 이어간다.

가야인들은 코살라 제국군을 피해 동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킴국(Sikkim)을 통과한 후,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 남만 땅으로 옮겼다.

가야인들은 양자강 상류에 있는 보주에 자리잡았는데, 지금의 중국 사천 안악이 그곳이다.

중국 전한의 한 관리가 가야의 미인을 발견하고 장안성의 한나라 원제에게 보냈으니 그녀가 바로 왕정군(王政君)이다.

황후가 된 왕정군은 조카 왕망을 장안으로 불러 대사마 벼슬을 주었는데, 서기 8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웠으나 15년만에 망하게 되었다.

이때 보주 일대의 가야인들이 위기를 느끼고 양자강을 따라 무창 지구를 제2의 망명지로 삼게 되었다.

가야의 한 집단은 계속 양자강을 따라 이동했는데, 버르마(브라만 司祭) 신분의 이 지도자는 허씨였다.

'허'란 버르마들이 모시는 신전의 무사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때 버르마 허씨는 16세의 아름다운 여동생 허황옥을 데리고 있었고, 크리슈나(무사)인 신보와 조광이 버르마 허씨와 허황옥을 호위했다.

약 30명 정도의 일행은 많은 금은보화와 사천의 특산물을 싣고 있었다.

그들이 바닷가(상해)에 도착했을 때 장사차 이곳에 온 큰무라의 무역선을 전세 내어 황해를 넘어갔다.

큰무라 뱃꾼들은 한려수도를 거쳐 구야에 도착했는데, 이때가 서기 48년 7월 27일이라고 가락국기는 전하고 있다.

이날 수로칸은 허왕옥 일행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유천간을 망산도에 신귀간을 승점으로 보냈는데, 이로 미루어 허왕옥 일행이 가야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모종의 협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16세의 아름다운 아유타 공주 허황옥과 국혼을 하고 더불어 상당한 금액의 대가를 바칠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인데, 가라를 일명 '금관가야'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갓관(冠)과 벼슬관(官)은 향토 소리를 뜻글자로 적는 과정에서 그리 적었을 것이다.

인도의 설화에 정복자에 대한 절대 복종의 표시로 황금관을 만들어 바치고 안위를 보장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왕후는 별포에 상륙한 후 높은 언덕에 올라 속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쳤다는데, 이는 옛날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흔히 있던 풍습이다.

이러한 행위는 신부가 속옷에 혈흔을 묻혀 숫처녀로 가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수단으로, 일반적인 풍습의 하나였다.

보주태후 허황옥을 황후로 맞은 금관가라의 수로칸은 그녀의 결혼 지참금을 이용하여 국력을 크게 일으켜 가라 동맹체의 맹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등등

김산호의 이야기는 더 계속되나 여기까지만 소개한다.

이광수처럼 허왕후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신화'일 뿐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김병모처럼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학자도 있다.

김산호 역시 허왕후 설화를 역사적 실체로 보고 이를 재구성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서로 비판을 통해 언젠가는 공인된 내용으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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