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석탑, 유전인자 등은 허황후는 인도에서 온 것으로 말한다.

 

북한학자 김석형,

허황후는 일본 큐슈의 가야분국에서 와

이덕일,

쌍어문을 볼 때 아요디야 왕국에서 온 것

허황후가 가지고 온 파사석탑 성분은 인도에서 나

가야 왕족의 유골도

인도인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과 가까워

이광수, 김병모는 허황후 신화에 부정적

전호태는 해양세력의 활동이라는 모호한 주장

 

▲ 가야 개국신화의 상상도.

 

가야 건국신화 4-3

북한학자 김석형은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승려'의 윤색이고, 실제 허왕후는 큐슈 가야분국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이덕일은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승려의 윤색

일 수 없다고 본다.

일연은 '고려 문종(1047~1083)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였던 문인이 쓴 것을 간략히 옮긴다'는 주석을 달았고, 실제 일연은 주석만 두 군데 달았을 뿐 아무 것도 윤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로왕릉을 납릉(納陵)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그려진 쌍어문(雙魚紋)은 실제 아요디야 왕국의 문양이며,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가락'이라 부른 것도 무심코 넘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전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연구에 의하면, 파사석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는 엽랍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엽랍석이 인도에서는 나오고 있으며, 인도 동남부의 타밀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점도 허왕후 출자설의 반증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가야 왕족의 유골이 인도인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과 가깝다는 연구도 있다.

<김해김씨세보>에는, 허왕후가 10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김씨 성의 거등왕이 되었고 그 다음 두 아들은 허씨가 되었으며 일곱아들은 태후의 동생 보옥선인과 함께 두류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만약 허왕후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김해김씨 445만 명이나 김해허씨 32만 명, 허왕후의 후손인 양천허씨 태인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등 8만4천 명은 뿌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2015년 기준)

여기까지가 이덕일의 연재를 내가 짧게 요약한 것이다. 이광수는 '인도에서 온 허왕후'는 '만들어진 신화'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모든 신화는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만들어진 신화 상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다거나 알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으므로 거짓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다.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설화는, 그 사실 유무를 떠나 '최소한' 해변가에 위치한 김해 주변에서는 석탈해를 비롯하여 유력한 해상세력들이 서로 다투거나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 해상세력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은 학자들이 더 다툴 수 있을 것이다.

전호태는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에서, 김수로왕의 육지세력이 허왕후의 해양세력과 연합하게 되어 더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탈해는 연합할 세력을 찾지 못해 계림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김병모 주장처럼, 허왕후는 인도에서 중국 안악(옛 보주)을 경유해 김해로 왔다고 보는 김산호의 설명을 약간 덧붙여볼까 한다.

아유타의 동남쪽에 가야라는 가난한 소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가뭄에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작은 웅덩이를 '가라'라고 했다.

가라란 언제나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를 뜻하며, 쌀과 물고기는 가야인들에게 생명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쌍어문 문양은 가야의 대표적 상징물로 인식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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