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역사 왜곡을 중단해야 한다.

글: 신종근(의사)

 

 

이제까지 고대 일본에 불교와 율령 등을 도입해

국가 틀을 잡았다고 알려진 성덕태자는 허구의 인물

일본은 법륭사를 이 가공의 인물이 세웠다고 가르쳐

법륭사는 백제 위덕왕이 588년에 기술자들 보내 세워

일본은 8세기 중엽까지도 돌 기초와 기둥 세우는 법 몰라

법륭사 금당 배흘림기둥 등 모두 우리나라 풍으로 지어

 

▲ 일본 최고의 성인 쇼토쿠태자가 들어간 지폐. '쇼토쿠태자는 허구의 인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책이 여럿 있다. 일본 역사의 허구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 일본 최고의 성인 쇼토쿠태자가 들어간 지폐. '쇼토쿠태자는 허구의 인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책이 여럿 있다. 일본 역사의 허구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쇼토쿠태자(聖徳太子)는 허구의 인물이다

고대 일본의 수도 나라(奈良)에 위치한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1400주기를 맞아, 호류지(法隆寺)에 보존되어 온 고대 일본의 불교 관련 유물들을 중심으로 쇼토쿠 태자의 생애와 고대 일본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고대 일본에 불교와 율령 등을 도입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되는 인물로 지폐에도 그의 초상화가 올라간 횟수가 일곱 번이나 된다.

호류지(法隆寺)는 쇼토쿠 태자에 의해 607년에 창건된 불교 사찰로, 670년 이후 재건된 금당과 5층 목탑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꼽히고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할까.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허구의 인물인데 말이다.

허구의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지었다는 법륭사(法隆寺, 호류지)를 특별 전시하는 '나라국립박물관'이 애처롭다. 또 한편으로는 한심하다.

허구의 인물 쇼토쿠 태자(聖徳太子)가 창건했다는 법륭사(法隆寺, 호류지)는 백제가 세운 사찰이다.

나라奈良에 현존하는 법륭사(法隆寺)는 607년에 창건되었는데 670년에 화재로 불타 버린 뒤 7세기 말 즉 680~690년대에 재건된 사찰이다.

백제 위덕왕은 588년에 백제의 고급 관리 은솔恩率 수신首信에게 백제 관리 4인과 혜총惠聰을 포함한 승려 9인, 절을 짓는 기술자 2인, 불탑 주조 기술자 1인, 기와 기술자 4인, 불화佛畫를 그리는 기술자 1인 등으로 구성된 사원寺院 조영팀을 거느리고 아스카에 가서 법흥사(法興寺, 후에 飛鳥寺로 이름이 바뀜)를 짓게 하였다.

607년 창건된 법륭사(法隆寺, 호류지)의 가람 배치와 그 절터에서 출토된 지붕 기와瓦當의 문양이 백제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창건 법륭사도 법흥사와 마찬가지로 백제가 조영한 사찰임이 분명하다.

▲ 쇼토쿠태자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일본인의 저서. 이시와타 신이치로가 쓴 책 '쇼토쿠태자는 없었다'의 표지
▲ 쇼토쿠태자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일본인의 저서. 이시와타 신이치로가 쓴 책 '쇼토쿠태자는 없었다'의 표지

 

법륭사 서원西院은 7세기 말에 재건되었고 법륭사의 동원東院은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다. 이 법륭사의 동원이 '홋타테하시라'掘立柱의 띠지붕 건물이었다는 것은 바로 그때까지도 일본인들이 독자적으로 '초석입주'礎石立柱의 기와집을 건립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7세기 후반에도 일본은 재건된 법륭사와 같은 '초석입주'礎石立柱의 사찰을 조영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석입주'礎石立柱의 가옥을 조영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면 20~30년마다 개축하는 데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홋타테하시라'掘立柱의 법륭사(法隆寺, 호류지) 동원東院을 건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세기 중엽에 일본인이 세운 법륭사 동원東院의 건축 구조가 일왕日王이 거처하는 가옥과 구조가 동일한 '홋타테하시라'掘立柱식이었다는 것은 일본인의 기술만으로는 8세기 중엽에도 '홋타테하시라'식 이외의 가옥은 짓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670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 7세기 말에 재건된 법륭사 서원西院은 공포栱包 양식의 사찰이며 금당 기둥의 배흘림 형태, 만卍자형의 난간 모양, 금당 내부 천장의 문양, 천개天蓋의 형태 그리고 각종 장식물에 이르기까지 통일신라의 것과 동일하거나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일본 사학자들은 법륭사(法隆寺, 호류지)와 관련이 있는 불상을 거의 전부 일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8세기 중엽에도 금金, 은銀, 동銅, 철, 안료顔料, 염료染料, 밀랍蜜蠟 등을 생산할 수 없었다.

따라서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이러한 물품을 사용하여 각종 불교용품을 제작하였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 일본은 8세기까지도 건축을 하는데 돌로 기초를 놓는 것이나 기둥을 세우는 방법을 몰랐다.
▲ 일본은 8세기까지도 건축을 하는데 돌로 기초를 놓는 것이나 기둥을 세우는 방법을 몰랐다.

 

8세기에도 신라인이 저술한 불경 주석서가 없이는 불경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준에 있던 일본이 고도의 불교문화를 가진 나라만이 만들 수 있는 불상이나 사찰을 6세기나 7세기에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이미 학문의 영역을 넘어선 허구의 주장이 된다.

출처

1.『오사카의 여인(한일 역사기행)』, 곽 경, 2015

2.『일본 고대사의 진실』, 최재석, 2010

백제 승려 목조상 유심히 본 일본 학생의 한마디 | 다음뉴스 -

https://news.v.daum.net/v/20210605194200333

▲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전 교수, 최재석은 일본이 한국에서 나간 세력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밝히는 많은 저술과 논문을 내놨다.
▲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전 교수, 최재석은 일본이 한국에서 나간 세력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밝히는 많은 저술과 논문을 내놨다.
▲ 곽경은 을 통해서 일본이 또 하나의 한국임을 밝혀 화제가 됐다. 
▲ 곽경은 <오사카의 여인>을 통해서 일본이 또 하나의 한국임을 밝혀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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