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추문 붕괴사건

"조선고적도보 탐방" 코너에서는 일제시대에 작성된 <조선고적도보>를 재탐사를 통해, 우리의 고적이 일제시대를 거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그 역사를 추적합니다. [편집자주]

▲영추문 외면 <사진-조선고적도보>

1926년 4월 27일 오전 10시에 영추문이 붕괴되었다. 붕괴 원인은 영추문 북쪽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는데 전차가 늘 왕래하여 성벽이 울리어 결국 무너졌다고 한다.

4월 28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경복궁의 영추문의 북쪽 한편이 돌연히 무너져 영추문 전체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고  동시에 그옆에 놀고있던 어린이 두명이 흙더미에 깔렸는데 그때 마침 지나가던 어떤 신문사 배달부와 차부가 발견하여 즉시 극력 구조한 결과 다행이 생명에는 관계가 없게 되었다."

사진으로 보면 전차 선로는 경복궁 궁장에 바짝 붙어 있다. 영추문의 육축과 궁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있고,  전차 한대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런데 담장의 두께가 엄청나고 돌로 쌓은 육축 또한 튼튼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전차의 진동으로 무너졌다는 것인데 이해 할 수가 없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공사로 지어진 지 50여년 밖에 안 된 궁궐의 대문과 궁장이 전차의 진동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0년전 폭탄 때문에 영추문이 무너졌다"(?)

일본인들이 발행한 경성부사에는 이렇게 적고있다.

"동학난 진압을 위해 급파된 일본 군사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기습할 때 수비대 군사들이 궁담에 폭약을 설치했는데 이날 마침 비가 내려 터지지 않았는데 이때 와서야 비로소  터졌다"

경복궁 습격사건은 1895년에 발생했는데 30 여년전에 설치해 놓은 폭약이 이제서야 터졌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아마도 누군가 몰래 숨겨 둔 화약에 의한 의도된 폭파사건으로 보인다.

일제는 이를 기화로 영추문과 좌우 궁장을 모두 헐어 버리고 투시형 울타리를 설치했다. 이에 앞서 일제는 광화문 안쪽에 콘크리트 구조에 돌을 붙힌 조선 총독부 건물을 건축하며 곧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눈에 가시처럼 보이던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버린 일제는 영추문과 궁궐 담장을 헐어버리는것 쯤이야 일도 아니였을것이다.

일본 총독부는 1923년 9월 광화문 전차선을 영추문까지 연장하면서 조선부업공진회가 열리기전에 완공하기로 한다.  1923년 9월1일자 동아일보에 '영추문까지 광화문 전차 연장'이란 기사가 나온다.

▲영추문까지 광화문 전차 연장 기사 <사진-동아일보>

경성부에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에 이르는 연장 400간 가량의 선로를 계획하고 총경비 20,000원을 들여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부업공진회의 입구가 광화문이었고 출구는 영추문이었기에 광화문까지 운행 하였던 전차 노선을 영추문까지 연장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1923년 9월 2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내용을 보면 일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경성전기회사에서 새로 광화문에서 영추문 까지 전철을 부설한다는...... 설계내용을 대강 듣건데 경기도청앞에서 광화문선과 연락하야 단선으로 영추문까지 이르게 하는것인데 현재의 길 모양대로 전차길을 내려하면 길 구비가 복잡할뿐 아니라 궁장의 서십자각 부근은 길도 좁고 또는 구비가 너무 심하여 궁장을 그대로 둔다하면 그 부근 인가를 헐어야 할 텐데 이와같이 함은 그곳 주민에게 막대한 손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경비도 더드는 까닭으로 총독부 당국과 교섭한 결과 서십자각으로 부터 광화문 쪽으로 50간, 영추문 쪽으로 10간 거리의 궁장을 허물어 버리게 되었으며 광화문 앞에 있는 돌난간도 다소간 헐릴 터 인데 이에 대한 비용은 전부 경성부에서 담당하기로.....  공사는 부업품 공진회가 열리기 전에 완성해야 일반의 편의를 도모할 것이다."

총독부는 영추문 전차선을 개설하면서 서십자각과 남북의 궁담을 헐어 버렸고 광화문앞 월대도 철거해 버렸다. 영추문 전차선 개설과 영추문 붕괴사건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 아래 궁궐의 담장과 대문을 없애 버릴려는 속셈이 엿보인다.

사실 영추문이 무너지기 이틀전 1926년 4월 25일 순종 황제가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영추문이 황제가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스스로 무너졌을리는 없고, 나라 전체가 침통하고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계획적으로 벌어진 사건임이 분명하다.

1926년 10월10일 영추문 전차선로는 복선화 공사가 진행되어 궁정동 육상궁 앞까지 복선으로 개통되었다. 이로써 총독부 건물을 감싸고 있던 광화문과 영추문 그리고 서십자각과 궁담을 모두 헐어버린 일제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던 경복궁의 민낯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람한 조선 총독부 건물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일제는 화려하고 웅장한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의 근정전 앞에 세움으로써 조선인들에게 그들의 기술력과 문명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만한 충분한 당위성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궁궐의 담장과 대문을 없애기 위한 계획적 범행

 
▲영추문 내면 <시진-조선고적도보>

조선초 한양으로 천도 당시 경복궁에는 궁담이 없었다. 몇년후 궁장과 궁의 사대문이 완성되어 서문으로 불리우다 세종8년에 이르러서야 영추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오행에서는 동쪽을 봄,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는데 동문은 건춘문이라 하였고, 서쪽을 영추문이라 하여 '가을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고종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관직에 따라 출입문을 달리 사용하게 하였는데, 승지는 영추문으로, 백관은 광화문으로 출입하게 하고 문관은 동쪽 협문을, 무관은 서쪽협문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건춘문은 상궁과 나인 그리고 왕실 종친들이 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영추문으로 난입하여 마침내 그들의 야욕을 드러냈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불꽃처럼 타오르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했고, 청군은 아산에 주둔했다. 이에 일본정부는 곧바로 제물포조약에 의해 자국의 공관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출동시키게 된다.

그해 6월 21일 새벽에 일본은 2개 대대를 이끌고 영추문으로 난입하였다. 일명 '경복궁 습격사건' 이다. 조선의 군사들이 총을 쏘며 저지를 하여 전투상황이 되자 고종이 중지하라는 명을 내려 겨우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조선 진출 야욕을 가감없이 보여 준 사건 이었다.

호시탐탐 대륙진출을 모색하던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청나라 원병이 도착 하자 마자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기보다 먼저 경복궁부터 접수하고 조정에 무력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일본은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대원군을 앞세워 개혁문제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현재의 영추문 <사진-홍철의>

지금의 영추문은 1975년 원래의 자리에서 40미터 이동하여 새로 지었다. 1968년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한 바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영추문 역시 콘크리트로 재현되었다. 이때는 이미 도로 확장으로 담장이 물러나 있었고 서십자각 역시 헐려 나가서 원형을 살릴 수는 없었다. 앞으로 경복궁 복원사업이 진행된다면 서십자각과 영추문 그리고 궁담까지도 제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영추문 연보

1396년(태조 5년)   경복궁 4대문 완성, 영추문 완공

1427년(세종 9년)   영추문을 수리하다.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공사 시작. 허계, 영추문 현판을 쓰다.

1894년(고종 31년)  일본군사가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하다.

                         일명 경복궁 습격사건

1910년 10월 1일   한일병합 조약체결, 총독부 설치결정

1915년 9월 11일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 개최

1923년 9월  1일   영추문 까지 광화문 전철 연장 결정

1923년 10월 5일   조선 부업품 공진회 개최

1926년  4월 27일  전철의 진동으로 영추문이 붕괴되다.

1926년 10월 1일   경복궁 경내에 조선 총독부 건물 완공

1926년 10월 10일  영추문 전차선 복선화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

글 사진 홍철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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