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석산은 조선의 국경선을 잡는 또 다른 움직일 수 없는 지표다.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다섯 번째)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제1회)

고조선 중심부에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어

갈석산은 고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

하북성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가짜 갈석산

 

1. 고조선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갈석산

지금까지 4회에 걸쳐 고조선을 흘렀던 습수‧열수‧산수‧패수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고조선의 강들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강물들이었다. 그러면 고조선은 어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성장 발전하였을까? 중국의 각종 사료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조선의 중심부에는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갈석산은 밤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같은 존재이다. 복잡다단해 보이는 별들의 운행은 북극성을 통하여 그 움직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민족의 상고사도 미로처럼 얽혀있지만, 갈석산을 알고 나면 한민족의 상고사가 뚜렷하게 시야에 펼쳐진다.

고조선과 갈석산의 관계를 최초로 기록한 책은 『회남자』이다.

A-1“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淮南子』「時則訓」

A-2“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 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淮南子』「時則訓」

위의 사료 A-1에서 『회남자』는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난다’고 하였다.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회남자』의 이 갈석산과 조선에 대하여 3세기 초 동한의 학자인 고유는 주석하기를 ‘갈석은 요서계의 바다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라고 하였다(사료 A-2).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으로부터 낙랑현, 즉 조선현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현(조선현)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위만조선(BC 194 ~ BC 108)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므로 사료 A-1에 나오는 『회남자』의 기록은 위만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생생한 1차 기록이다.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회남자』의 기록은 아래의 사료 B-2 나오는『태강지리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기색은』은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서진의 초대황제인 무황제 태강(太康, 280~290) 년간에 편찬된 지리서이다. 한나라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중심지에 설치하였다는 한나라의 군현으로, 후한과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에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갈석산은 고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

위에서 살펴본 『회남자』와 『태강지리지』의 기록은 한민족 상고사에 한줄기 빛과도 같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고조선의 중심부에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산천이야 어찌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갈석산을 찾을 수 있다면 고조선의 중심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 갈석산에 깊은 관심이 가는 이유이다. 과연 고조선의 갈석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다. 그리고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도 예로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데 갈석산 관련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본래 갈석산은 하나뿐이었다.

갈석산은 『서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아래의 사료 B-1이다.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무척이나 평범하게 보이는 이 구절은 그러나 한민족 상고사에 있어서 태풍의 눈과 같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한 갈석산은 바로 사료 B-1에 나오는 갈석산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B-1“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書經』夏書, 禹貢第十‧十一章

B-2 “『사기집해』: 공안국은 말하기를 ‘갈석은 해변가의 산이다’ 하였다. 서광은 말하기를 ‘해海는 하河로도 쓰여 있다’고 하였다.

『사기색은』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

集解孔安國曰:「碣石,海畔之山也.」 徐廣曰:「海,一作『河』.」 索隱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史記』卷二, 夏本紀第二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 우임금 시절에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갈석산을 우임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우공갈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갈석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구절로부터 파생되었다.

본래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이 ‘우공갈석’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래의 <그림 1>에서 보듯이 황하 하류의 흐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 많은 변동이 있었다. 또 발해의 해수면 높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갈석산이 있었다는 ‘황하 하류 해변가’의 위치도 시대를 따라서 달라졌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한 학자들이 사료 B-1의 『서경』에 나오는 ‘우공갈석’을 자기 시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찾게 됨으로써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필자는 이들 갈석산들이 학자들의 착오로 인하여 생겨났으므로 ‘착오 갈석산’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역사왜곡을 위해 황하의 흐름과는 무관한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갈석산들을 ‘가짜 갈석산’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들 ‘착오 갈석산’과 ‘가짜 갈석산’들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민족의 상고사가 미로를 헤매고 있다.

▲ <그림 1> 각종 갈석산과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 황하 및 해안선의 변화는 Tristram R Kidder(워싱턴대 교수) & Yijie Zhuang(런던대학 연구원)의 공동논문『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을 참조하였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본래의 갈석산인 ‘우공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그리고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착오 갈석산’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며, 다른 하나는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역사왜곡을 위해 본래의 갈석산을 동쪽으로 지명 이동한 ‘가짜 갈석산’도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이며, 다른 하나는 현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유의미한 갈석산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5개 중 하나이다. 나머지 몇몇 갈석산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들로 생략한다. 사료를 통하여 이들 갈석산들의 위치와 생겨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5개의 갈석산을 올바로 이해하면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한민족 상고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림 1>에서 표시한 5개의 갈석산에 대하여 각각의 갈석산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먼저 결론부터 간략하게 살펴본 후, 뒷부분에서 관련 사료들을 통하여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갈석산 특징

(1) 갈석산1 : 본래 갈석산

①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다. 고조선의 중심부이자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했던 갈석산이다.

② 『서경』에 나오는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본래의 갈석산으로 ‘우공갈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③ 고대 ~ BC 602년까지 <그림 1>에서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를 당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이다.

 

(2) 갈석산2 : 착오 갈석산

① 발해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는 상상속의 갈석산이다.

② BC 602 ~ AD 15년까지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르면서 생겨난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를 때는 ‘황하 하류 해변가’에 산이 없으므로 학자들은 갈석산이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고 생각하였다.

③『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다.

 

(3) 갈석산3 : 착오 갈석산

①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② AD 15년 이후 황하가 Ⓒ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생겨났다. 4세기 진晉나라 사람 곽박이 주석한 『산해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③ 현재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4) 갈석산4 : 가짜 갈석산

①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AD 801년 편찬된 『통전』이후부터 등장하는 ‘가짜 갈석산’으로, 현재 중국에서 무체현의 갈석산과 함께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② 이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해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을 1천여 리 동쪽으로 지명 이동한 ‘가짜 갈석산’이다.

③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 요나라 시기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 등 3단계의 왜곡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으로 지명 이동되었다. 한민족 상고사를 짙은 안개속으로 몰아 넣은 갈석산으로,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저질러진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체이다.

④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이란 구하(九河, 황하 하류)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였다는 설이다. 황하 하류는 아홉 갈래로 나누어져서 ‘구하九河’라 불렸다.

⑤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은 송나라 주자학파들이 난하 하류의 산을 갈석산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학설이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산인데,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황하 하류로부터 북쪽으로 500여리나 떨어져 있는 산이므로 갈석산이 될 수 없는 산이다. 그래서 주자학파들은 황하 하류로부터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500여리가 본래는 육지였고, 구하(九河, 황하 하류)가 그곳까지 흘렀는데, 이 500여리의 육지가 침몰하여 바다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황하 하류와 갈석산이 서로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⑥ <그림 1>에서 보듯이 발해만 일대는 황하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육지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는 ‘구하윤해설’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그러므로 ‘구하윤해설’을 근거로 생겨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가짜 갈석산’이다.

 

(5) 갈석산5 : 가짜 갈석산

① 한반도 평양 일대에 위치한다는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②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역사왜곡하면서 생겨난 ‘가짜 갈석산’이다.

③ 현재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일대까지 그리고 있다. 『태강지리지』등의 기록에 의하면 만리장성의 동단은 갈석산이므로, 중국은 일제 식민사학을 활용하여 갈석산을 한반도 평양 일대의 산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짜 갈석산’은 현대판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다.

* 갈석산은 여러 사서에서 그 기록이 매우 풍부하여, 이들 기록을 통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존재했다는 분명한 시‧공간적 좌표를 가지고 있는 산이므로, 현대과학으로도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갈석산을 통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를 추론이 아닌 과학의 단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블랙박스 같은 존재이다.

갈석산은 한민족의 상고사가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두 번의 커다란 왜곡을 겪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었던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었다.

그런데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에 의하여 본래의 갈석산이 난하 하류 방면의 ‘가짜 갈석산’으로 1차 왜곡되었다.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고조선의 중심지도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하여 난하 하류 방면으로 역사 왜곡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저질러진 고대판 동북공정이다.

또 일제강점기 때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하여 낙랑유물 조작을 통하여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한반도 평양 일대로 지명 이동되었다.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고조선의 중심지도 함께 동쪽으로 2천여 리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역사 왜곡되었다. 현재 중국은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을 활용하여 현대판 동북공정을 진행 중에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중심지는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두 번의 커다란 역사왜곡을 거치면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서 동쪽으로 3천여 리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왜곡되었다. 갈석산이 온몸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현재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하는 재야사학계나,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모두 이러한 갈석산의 증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회 계속>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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