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겨울밤

첫째 날

남북공동학술토론회를 위해 역사학자들이 인천 공항에 모였다. 평양행 고려항공기 탑승 전 강만길 교수께서 “딱 한 가지 만 부탁합니다.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역사적인 남북 학술대회 팀장의 조크 같은 일성에 모두 웃었지만, 그 속뜻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북한 학자들이 훨씬 술이 쌘데 우리가 자제력 없이 대작하다가 가끔 실수를 합니다.”라고 절주를 부탁했다. 모두가 박수로 동의하며 트랩을 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평양을 직항으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베이징을 경유해서 가야했지만, 우리는 북한의 고려항공이 인천에 와서 평양으로 직접 데려갔다. 이런 칙사 대접은 강만길 교수가 팀장이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천 공항 활주로에 ‘고려항공’이라는 글씨가 선연한 북한 비행기를 봤을 때 기분이 참 묘했다. 흥분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짐짓 태연한 척 했다.

우리는 딱 55분 만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껌과 과자를 나눠줬고, 노동신문과 금수강산이라는 잡지를 돌렸다. 잡지는 56쪽. 올 칼라는 표지를 포함해서 모두 12쪽이다. 그 중 "까마귀도 오디 단줄은 안다. 하물며 xxx당 패거리들이 돈 단 줄을 모르겠는가."라고 쓴 남한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내리기 전 보건담당 요원이 올라와 건강에 별일 없었느냐고 묻고 내려갔다.

아! 이렇게 가까운 곳, 자전거로 와도 한나절이면 올 수 있을 것 같은 옆 동네. 가슴속이 허허로 왔다. '평양'이라는 현판이 큰 명찰처럼 걸려있는 조선인민공화국 최고의 공항이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우리가 온다니 잘 준비하고 기다려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고려항공 로고가 선명한 네 대의 비행기만 보였다. 공항 입국장도 썰렁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공항이 붐벼야 하는데, 너무 차분한 공항을 보니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휙- 지나갔다.

숙소는 1995년에 완공된 양각도 호텔. 객실이 1,001개인 전면이 유리로 된 최신식 호텔이다. 생활에 큰 불편 없이 지날 수 있었지만,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섬이라 다른 시민들과 쉽게 접촉 할 수는 없었다. 양각도란 이름은 섬 모양이 양의 뿔 같아서 붙여진 것이란다. 아쉬운 점은 역시 이곳도 너무 고객이 없어 도리어 불편했다. 이렇게 시설 좋은 호텔에 세계의 비즈니스맨들이 북적북적 해야 하는데, 중국인 서너 명만 볼 수 있어서 너무 허전했다. 속살까지 찬바람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여장을 풀고 곧바로 만경대로 향했다.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곳이다. 그들의 모든 출판물에 예수의 탄생 연호 서기는 괄호 안에 쓰고 김일성이 출생한 첫해를 기준한 주체란 연호를 더 많이 썼다. 주체 1년은 1912년. 올해(서기2004년)는 주체 93년이다. 평양의 변두리에 있었고 학생소년궁전과는 지척간이다. 주위가 잘 단장되어 있었으며 만 가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여 만경대란다. 안내원 동무가 김일성이 14세에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집을 떠날 때는 장엄하게, 다시 돌아와 사립문 앞에서 어머니를 상봉 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설명했다.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킬 때 조부 김응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단다. 그는 그래서 바로 이곳이 '조선혁명의 요람'이라고 소개한다. 그 말은 뻥이지 만 그냥 들어줬다. 김일성은 혁혁한 독립운동가로 소개했다. 사실 김일성이 독립 운동할 때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으니 유구무언이다.

저녁에는 호텔에서 만찬이 있었다. 열 두어 가지의 음식이 조금씩 차례로 나왔다.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고, 짜거나 맵지 않았다. 약간의 김치 국물이 함께 있는 '통김치' 맛이 일품이었다. 숙소에서 창밖의 어두운 평양시가지를 보면서 소문대로 전력사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내원들과 가끔씩 이야기하면서 미국이 경수로에서도 개성에서도 에너지 공급을 방해한다는 말을 할 때는 우리도 암묵적으로 동의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지나면서 가장 많이 보고 읽은 구호는 ‘정치사상전선, 반제군사전선, 경제과학전선’의 소위 ‘3대 혁명 만세’였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이들이 경제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둘째 날

인민문화궁전에서 '일본해'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는 서로의 뜻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본을 성토하며 마감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이런 학술 토론을 하며 인민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 곳이란다.

'일본해'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 장면

토론회 후 모란봉 을밀대를 산책하면서 모두들 봄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느린 걸음으로 한번 돌아 내려오는데 30분 정도였으니 산책하기에 딱 좋았다. 우리 눈길을 잡은 소련군 '승전기념비'는 “조선인민을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하고 조선에 자유와 독립의 길을 열어준 위대한 쏘련 군대의 영웅적 공훈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나리라.(1945,8,15)”고 찬양했다. 그 곳도 역시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아 겨울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점심식사는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옥류관의 랭면. 20그람 씩 제공하는 두 종류를 접대원동무가 주문 받는데 우리 테이블에는 전에 이곳을 다녀간 분이 10그람 씩 두 가지를 주문 할 수 있다고 해 두 가지를 시켰다. 하나는 우리의 물냉면과 비슷하고 한 가지는 비빔냉면과 같은 것이었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긴장해서 일까? 맛이 감동을 줄만큼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맛있다는 느낌을 가졌고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미 테이블에 나온 맥주나 소주 외의 음료를 먹기 위해서는 바꾸어먹을 수 있었다.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소주를 주고 오미자 단물을 먹었는데 상큼한 맛이 좋았다. 식당 앞에 작은 포장마차가 세 군데 있었고 음료수를 파는 것 같았는데 안내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하나 사먹어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 작은 판매대는 평양의 거리에서 가끔 있다가 없어지곤 했다. 오후에는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가 있었다.

을밀대

늦은 오후에는 남한에도 많이 알려져 유명해진 <평양교예극단>의 공연관람이었다. 이미 우리가 TV에서 많이 본대로 일사분란한 최고의 서커스였다. 우리가 입장하기 전 많은 인민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으며 우리는 정 중앙의 준비된 빈자리에 앉았다. 그들 중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네 위에서 나비처럼 나르듯 옮겨 다니는 묘기를 보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네에서 떨어진 한 소녀가 다시 올라갔지만 또 떨어진 후에는 저 아이가 공연 후 크게 질책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염소와 작은 원숭이를 잘 훈련시켜 재주를 부리게 한 것이 그 날 공연에서 압권이었다. 달리는 일곱 마리의 말 위에서 뛰어오르고 물구나무서고 하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진지함과 웃음이 있는 즐거움의 한마당 이었다. 그 곳에서 특이한 경험은 화려한 응접실과 호텔 수준급의 깔끔한 화장실이었다. 저녁 6시 30분 쯤 공연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 잠시 후 길 건너편의 아파트에 일제히 전기 불이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6시 45분이었다. 동승한 사람들끼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출퇴근 시간에만 운행된다는 둥, 한 번도 운행되지 않아 전투적인 정신으로 매일 걸어 다닌다는 둥, 확인할 수는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노약자들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했다.

4차선 6차선 등의 거리는 넓어서 시원시원했고 청소가 잘되어 있어서 청결했다. 눈에 거슬리고 마음 아픈 것은 아파트의 베란다에 찬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걸친 가림막이 었다. 물자(유리)가 부족하여 양복입고 갓 쓴 격이니 도시 미관을 결정적으로 해치고 있었다. 자동차가 별로 없고 걷는 인민이 많으니 자전거 보내 주고, 추 운 겨울밤을 생각해서 유리 보내기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저녁 만찬은 <보통강려관>에서 있었다. 양각도 호텔이나 고려호텔 보다 격이 낮은 곳이지만, 최근에 통일교에서 인수하여 리 모델링을 하고 분위기를 쇄신시켜서 깔끔했다. 그 옆에는 철 구조물로 통일교의 웅장한 교당을 건설하고 있었다. 통일교가 세운 자동차 공장이 가동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휘파람'이라는 자동차 브랜드 광고물이 평양 시내 곳곳에 있었다. 자존심 강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금은 경제적인 지원이 아쉬워 통일교와 가까이 지나지만 미래 지향적으로 볼 때 이런 것이 과연 덕이 될까? 독이 될까? 아! 만찬에서 밥 잘 먹어 배는 부르지만 유쾌하지 못한 둘째 날이다.

 

셋째 날

오늘은 북한방문 최고의 날. 덕흥리 벽화무덤과 강서 대묘의 벽화를 직접 본 날이다. 덕흥리 벽화무덤은 408년(광개토대왕18년)에 축조된 것으로 지난 1976년 발견되었다. 지금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 지정(우리가 다녀온 4개월 후 지정 됨)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한국 고대문화사의 대표적 유물이며 고구려 벽화무덤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고구려 무덤이 80여기 발굴됐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6백여 자의 문자가 기록된 것도 처음이다. 은하수와 견우직녀의 그림이 있었고 내가보기엔 환한 미소를 짓는 소녀의 모습도 있었다. 강성한 고구려가 베이징 근교까지 강역을 넓혔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무덤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남한의 손님들 중에는 유홍준 선생이 처음이었다. 우리가 두 번 째보는 것이다. 함께 한 모든 분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강서 대묘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현무도가 있는 곳이다. 거북과 뱀이 뒤엉켜있는 것을 서로 싸우는 것이냐, 사랑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아직도 일치를 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사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무덤의 천정 구조 만 봐도 그것의 완벽함이란 신라 불국사에 석가탑이 있다면 고구려에는 강서 대묘가 있다고 해야 할 게다.

덕흥리 벽화무덤 안내문

점심식사는 단고기(영양탕)로 했다 역시 깔끔한 맛이 일품이었다. 아래층에서 식사하기 전 비교적 고급스러워 보이는 머플러를 하나 구입했는데 판매한 여성동무가 물건을 사줘서 고맙다며 식사 후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팔짱을 딱 껴서 당황했다. 나는 여기서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겸연쩍어 했다. 그녀는 나의 쑥스러움은 아랑곳 하지않고 환한 미소로 나를 편하게 대해줬다. 

오후엔 조선 역사 박물관을 참관했는데 좀 빈약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공연관람이 있었다. 노래도 무용도 너무 잘해서 맘 편치 못했다. 특이한 것은 쌍둥이들이 같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는 '민족식당'이라는 곳에서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식사 후 우리의 옛 노래를 하는 직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황혼이었고 도로의 우측은 전기가 들어 왔고 좌측은 들어오지 않았다.

 

넷째 날

동명왕릉을 참관했다. 너무 현대적으로 개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몽의 설화를 들을 때는 어버이 수령 김일성의 대를 이은 김정일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는 것처럼 오버랩 되었다. 평양 지하철을 탑승 할 수 있었다. 부흥역에서 영광역까지 가는 한 코스 5분 정도의 승차였고 지하 100미터에 있었다. 화려한 궁전 같았다. 평양에는 엑스 자 형태의 두 개 노선에 21개의 역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이후락이 북에 밀사로 와서 이 지하철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오면서 올라가는 주민들에게 “우리 서울서 왔어요, 반갑습니다.”라고 해도 그냥 목례만 할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쑥스러웠고 찜찜했다. 내려가니 북한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모든 주민을 흩어지게 한 저들의 일사분란 함이 놀라웠다. 우리만 별도로 준비된 전철에 탑승 했다. 내려가면서 내심 전철 안에서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주민들이 한사람도 승차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대동강 쑥섬 혁명사적지에서는 남북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노력을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우리숙소의 맨 윗 층 피아노가 있는 곳에서 북측의 접대원과 차 마시며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영화음악의 주제곡을 배워서 합창했다.

                  1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여 진대도 헤여 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잊어. 

               2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랴
                  잠간 만나도 잠간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마지막 날

북한 여군의 한담 모습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참관, 70m의 주체 탑은 석탑으로서는 세계 제일이라는 둥 평양의 개선문이 파리의 에펠탑보다 10m더 높다는 둥 3백톤 짜리 돌들로 쌓았다는 등의 설명을 들으면서 북한의 지도부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모두는 저 돌 하나면 북한인민이 한 달은 편히 먹을 텐데 라고 했다. 일반 가게에서 물건을 좀 사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대성 수출품 전시장'에서 몇 가지 선물을 구입했다. 제일 의미 있는 선물은 새들의 속 날개로 풍속화를 만든 작은 병풍인데 그 정교함에 경탄했다. 

호텔에서 양복과 와이셔츠 세탁을 맡겨보았다. 만족스러웠고 방을 청소하는 중년의 안내 여성들은 남편들이 교수나 의사라고 했다. 호텔에서 일하는 것이 비교적 고급 노동(?)이라서 그런 가 고 생각했다 사실 외국인들도 올테니 외국어도 좀 해야하고 실수하면 안되니 비교적 고급인력을 배치했나 고 생각했다. '21세기를 위대한 김정일 세기로 빛내자' 는 구호를 읽으며 평양을 떠났다.

글 박원홍(코리아히스토리타임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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