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날조한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북한 평양에 없었다.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속현 중의 하나인 점제현이

북한 평안남도 용강군이라고 날조한 이마니시류(今西龍),

우리 상고사를 난도질한 그가 가져온 점제현 신사비,

남북한 전문학자들, 모두에게서 가짜로 판명나다.

 

 

(2) 『사기』「조선열전」에 나타난 열수의 위치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수륙양군 6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육군은 좌장군 순체가 지휘하였고, 수군은 누선장군 양복이 지휘하였다.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1년 이상 이어진 장기전이 되었는데 조선왕 우거가 암살되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 무제는 조선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겼으면 큰 상을 받아야 할 한나라 장수들은 모두 큰 벌을 받았다. 위의 사료 B-6에서 보는바와 같이 육군대장 좌장군 순체는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목으로 기시棄市에 처해졌다. 기시는 죽여서 시체를 저자거리에 버리는 무거운 형벌이다.

수군대장 누선장군 양복은 열구洌口에서 육군을 기다렸다가 합세하여 왕검성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수많은 군사들을 잃은 죄목으로 주살될 처지였으나, 속전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여기서 누선장군 양복이 좌장군 순체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열구洌口는 고조선의 열수가 발해로 들어가는 곳이다. 열구에서 수륙양군이 합류하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기로 한 것으로 보아 열구는 왕검성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열구의 위치에 대하여 『사기색은』은 소림의 말을 인용하여 “(열구는) 현의 이름이다. 바다를 건너면 먼저 만난다.”고 하였다. 한나라 수군은 산동반도에 위치한 제나라에서 발해로 항해하였으므로, 소림이 말하는 바다는 발해를 가리킨다.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넜다고 하면 보통 요동반도나 한반도 일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료 B-7은 전국시대 합종책을 주장한 소진이 조나라 왕을 찾아가서 유세하는 내용인데,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거나 조나라를 공격할 때 제나라는 항상 발해를 건너서(齊涉渤海) 군사를 파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산동반도에 위치한 제나라에서 배를 타고 조나라와 연나라 사이의 해변가 어느 지점에 당도하는 것을 ‘발해를 건넌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색은』은 소림의 말을 인용하여 ‘열구는 바다를 건너서 먼저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으므로 열수가 발해로 들어가는 열구 또한 연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해변가 어느 지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에서『산해경』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열수를 현 중국 하북성 남부지역을 흐르는 호타하로 비정하였는데, 현재 호타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하북성 천진시 일대이다. 그런데 하북성 지역의 강물들은 하류에서 그 흐름이 자주 바뀌었고, 옛날에는 해안선도 지금보다 더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열수(호타하)가 발해로 들어가는 위치도 천진보다 더 서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므로, 열구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와 천진시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이 보는 열수의 위치

(1) ‘낙랑군 재난하설’에서 보는 열수의 위치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하는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고조선 연구』등에서 고조선의 열수를 하북성 난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로 보고 있다. 열수洌水(列水)는 무열수武列水의 약칭으로, 중국문헌에서 약칭이 사용되는 경우는 흔하다는 것이다. 청장수淸漳水를 장수漳水로, 압록수鴨綠水를 압수鴨水라고 표기한 것이 그 예라고 하였다.

윤내현의 주장처럼 중국문헌에서 약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흔히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반화하여 무열수武列水가 바로 열수洌水(列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고조선의 열수가 난하 또는 그 지류라고 한다면, 앞에서 사료 B-2의 『산해경』에서 연나라가 열수의 북쪽에 있다고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난하는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이므로 난하의 북쪽은 난하의 동쪽지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산해경』의 기록에 의하면 난하의 동쪽이 연나라 지역이 되는데, 윤내현은 난하를 기준으로 동쪽은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하였다. 윤내현이 난하 또는 그 지류를 고조선의 열수로 계속 주장하려면, 이러한 모순점에 대하여 해명할 필요가 있다.

▲ 조선총독부 소속, 이마니시류가 외부에서 가져다가 들판에 세워놓은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 왼쪽에 서 있는 아이의 눈빛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억지로 아이를 대려다가 사진 찍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는 상당히 긴장해 있고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2) ‘낙랑군 재평양설’에서 보는 열수의 위치

한국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고조선의 열수를 북한 평양지역을 흐르는 대동강으로 보고 있으며, 열구의 위치는 황해도 은률로 비정하고 있다. 열수를 대동강으로 보는 근거는 일본학자들이 1913년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하였다는 ‘점선평산군신사비秥蟬平山君神祠碑’인데, 일반적으로 ‘점제현신사비’로 불리고 있다.

『한서』「지리지」낙랑군 탄열현呑列縣 주석에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점선평산군신사비秥蟬平山君神祠碑’에 점선秥蟬이라는 글자가 보이므로, 『한서』「지리지」의 열수가 지나가는 점선黏蟬과 같은 곳으로 인식하여 ‘점선평산군신사비’가 발견된 주변을 흐르는 대동강이 열수가 틀림없을 것으로 인식하였다.(關野貞등, 『樂浪郡時代の遺跡』240~245쪽; 今西龍, 「洌水考」179~193쪽 참조)

그러나 중앙일보 1995년 5월 8일자 북한뉴스 기사에 의하면 북한학자들에 의하여 “낙랑군 평양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제시돼 온 ‘점제현신사비’가 일제의 날조품이었다는게 밝혀졌다.”고 한다.

이러한 북한학계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점제현신사비’는 점선秥蟬으로 『한서』「지리지」의 점선黏蟬과 한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비석은 이동‧조작이 가능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위치비정의 절대적인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고조선의 중심 강인 열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위의 사료 B-4에서 보았듯이 중국 진晉나라 시대의 정사인 『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군에 속했다’하였으므로,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진의 평주에 낙랑군과 대방군 등이 설치되었으므로 낙랑군과 대방군도 당연히 하북성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대방군을 흘렀던 열수 또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을 흘렀던 열수를 찾는데 있어서 중국 정사의 기록과, 일제가 발굴‧조사한 ‘점제현신사비’ 중 어느 것이 더 사료적 가치가 있을까? 해답은 자명하다고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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