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반도 복속음모, 동북공정을 돕는 매국식민사학계...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야,

『사기』「조선열전」은 가장 기본적인 사료

고조선 관련 사료 매우 풍부하게 남아있어...

 

글 싣는 순서

1. 고조선의 습수는 하북성 북경지역을 흐르는 영정하

2. 고조선의 열수는 하북성 남부지역을 흐르는 호타하

3. 고조선의 산수는 하북성 북경지역 흐르는 조백신하

4. 고조선의 패수는 하북성 보정시 지역을 흐르는 당하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

6. 고조선의 왕검성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滿城에 위치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8. 신라인들은 낙랑 사람으로 하북성 보정시에서 망명

9. 고조선의 준왕은 하북성 보정시의 왕검성에서 망명

10. 고조선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위치

▲ <그림 1> 낙랑군 및 고조선의 갈석산과 습수, 열수, 산수, 패수의 위치

고조선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이다. 과연 고조선은 어디에 위치하였으며, 그들이 꽃피운 역사와 전통문화는 어떠하였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고조선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람직한 일로 우리의 뿌리를 찾아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고조선 논쟁의 핵심은 잘 알다시피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사기』「조선열전」에 의하면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하고, 고조선의 중심부에 한나라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통하여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위의 <그림 1>에서 보듯이 대략 4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다. ‘낙랑 1’은 필자와 심백강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하북성설’이다. ‘낙랑 2’는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난하설’이다. ‘낙랑 3’는 구한말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낙랑군 재요동설’이다. 마지막으로 ‘낙랑 4’는 노태돈과 송호정 등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이다.

현재까지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윤내현을 비롯한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은 중국의 25사를 비롯한 각종 문헌기록을 토대로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은 일본학자들이 평양지역에서 발굴‧조사한 낙랑유물들을 근거로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윤내현이 ‘낙랑군 재난하설’을 주장한 이래로 두 학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30여 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오고 있다.

필자는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을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두 학설 모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첫째,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역사지리의 기본은 강과 산 등의 자연지형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한 나라의 도읍지는 뒤로 큰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큰 강물이 흐르는 지역에 형성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이해하려면 먼저 북한산과 한강을 알아야 하듯이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려면 먼저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기』「조선열전」의 본문과 주석에는 고조선에 습수‧열수‧산수‧패수라는 강물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회남자』나 『태강지리지』 등 수많은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중심지에는 갈석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위치를 올바로 밝히려면 먼저 고조선의 강산인 습수‧열수‧산수‧패수와 갈석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강단과 재야를 막론하고 여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다.

둘째, 『사기』「조선열전」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하고 그 중심지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는데, 『사기』「조선열전」은 이 전쟁의 전모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당시 한나라 조정의 태사령으로 있었는데, 태사령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와 조정 의례의 기록 등을 맡은 중요한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전모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사기』「조선열전」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1차 기록이라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기』「조선열전」으로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을 검증해보면 많은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기』「조선열전」에서는 ‘위만조선의 강역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두 학설 모두 위만조선의 강역이 사방 천 리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많이 있는데 앞으로 하나씩 밝혀나갈 것이다. 고조선을 이해하려면 『사기』「조선열전」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사고전서』의 풍부한 사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고전서』는 중국 청나라 건륭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중국 최대의 총서이다. 그때까지 전해오던 역대의 중요한 자료들을 망라하여 경, 사, 자, 집의 4부로 나누어 편찬하였는데, 약 8만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고전서』에는 고조선 관련 자료들도 매우 풍부하게 수록되어있다. 오늘날 고조선을 연구하는 강단사학자들은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불평을 한다. 참으로 잘못된 시각이다. 『사고전서』속에는 개인이 평생을 연구하여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고조선 관련 기록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현재 일본과 중국에서는 『사고전서』를 디지털화하여 일반 국민들도 손쉽게 관련 기록들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가 차원에서 『사고전서』를 디지털화하고, 고조선 관련기록들은 한글로 번역하여 일반국민들도 손쉽게 관련 기록들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고조선의 중심지나 강역문제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에 주목하여 첫째,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자.” 둘째, “『사기』「조선열전」을 철저하게 연구하자.”. 셋째, “『사고전서』에 풍부하게 수록된 고조선 관련기록들을 잘 활용하자.”는 세 가지 원칙을 정하고 낙랑군의 위치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위의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조선의 중심에 위치하였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며, 고조선을 흘렀던 습수는 영정하이며, 열수는 호타하이며, 산수는 조백신하이며, 패수는 당하였다.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핵심근거 10가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독자제현들의 질정을 기다린다.<계속>

글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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