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할 수 없는 해동성국, 대진국 발해 화폐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국 <신당서>에는 대진국, 발해의 연호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남북국 시대 화폐
 

고구려가 망한 서기 668년부터 후백제가 건국된 서기 892년까지 225년을 우리 역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대를 구분하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渤海 서기 698-926)가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다. 신라와 발해가 병존하던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보면 발해 역사도 우리 역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0에는 서기 790년과 812년에 발해에 사신을 보내 것을 북국(北國)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신라가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남북국시대로 분류하는 것이 당시 역사 인식에도 부합된다.


  발해는 고려 중엽부터 우리 역사에서 사실상 삭제된 나라였다. 발해는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 후신인 고려로 지었지만 고려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발해가 빠졌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발해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대모화주의와 소중화에 빠져 반도에 안주한 탓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유득공(柳得恭 서기 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가 우리 역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채호 선생은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해 300년의 문치와 무공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 동안 사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빼버린 결실(缺失)을 뒤늦게 보완하였다”고 『발해고』를 높이 평가했다.


  고조선이 망한 후 열국시대 중기까지도 고조선 화폐인 명도전이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서울 잠실에 있는 백제의 풍납토성에서 대량의 명도전이 발굴되었는데 대략 서기 3세기 유물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가야 지역에서도 비슷한 시기 명도전이 발견되었다. 백제 무령왕(재위 서기 501-529) 능에서는 중국의 오수전(五銖錢)이 대량 발견 되어 당시 국제무역이 화폐로 결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남북국시대가 시작되기 전 대략 150년 전이다. 오수전은 중국 서한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남북국이 교류했던 당(唐)나라 때인 서기 621년에도 주조되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열국시대 중기 이후와 남북국시대에 스스로 화폐를 발행한 기록이 없고 실물도 발견되지 않는 점은 의문이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는 화폐경제가 정착되어 있었고 남북국이 당나라와 밀접하게 교류했지만 화폐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명 교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북국인 발해는 제도가 정비되고 문물이 융성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어졌으니 산업이 발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주변지역과 거란도, 영주도, 조공도, 신라도, 일본도 등 5개 길을 개설하여 적극적으로 교역했다. 항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과의 교역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발해의 옛 성터인 연해주 노브고르데에프에서 중앙아시아 소그드 문자가 새겨진 은화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중앙아시와 교역했음도 알 수 있다. 발해지역에서 수백 점의 십자가와 마리아 상이 출토된 것도 발해의 교역 범위가 광대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화폐에 관한 기록은 없다. 신라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했다. 특히 장보고(서기 ?-846)는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동북아 해상무역 왕이었지만 그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화폐 기록은 없다. 신라에는 각 산업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었고 거래도 활발했지만 금속화폐를 발행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2006년 10월 13일 세계일보가 발해  금화가 출현했다고 실물과 함께 보도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화 5개다 각 금화는 가로 3cm 세로 5cm 무게 30g 정도다. 금화 명칭은 발해통보(渤海通寶)이고 발행연도는 천통8년(天統捌年)이다. 상전(上田) 중전(中田) 서전(西田) 남전(南田) 동전(東田)이라는 문자가 5개의 금화에 새겨져 있다. 이 금화의 모양은 중국 고대 화폐인 원시포(原始布)와 유사하다. 재질은 금이다. 진품이라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에 동옥저와 신라가 무늬 없는 금화를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동북아지역에서 금화를 발행한 기록도 없고 실물도 발견된 적이 없다.                 

▲ 대진국, 발해에서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금속 화폐. '천통8년'이라는 명문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태조 대조영때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대진대학교 서병국 교수가 이 금화를 공개했다. 서 교수에 의하면 천통(天統)은 발해 시조 고왕(高王)인 대조영(大祚榮)의 연호이고, 8년(捌年)에서 한자 捌은 중요한 국가 문서에서 8(八)을 표기하는 한자다. 上 中 西 南 東은 발해의 오경(五京)을 의미하며 이 글자와 함께 각 금화에 새겨진 선을 오경의 위치에 적용하여 종합하면 대체적인 발해의 강역이 그려진다고 서 교수는 설명했다. 만주 흑룡강성 영안시에서 1930년대에 발굴되었는데 실향민이 보관해오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서병국 교수는 일상 거래에서 사용된 화폐라기보다는 발해국 건국을 축하하는 기념 금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금화가 진품일 수 없다는 여러 비판이 이어졌다. 보관상태가 너무 좋다. 대조영 재위 중에 천통이라는 연호를 쓴 기록이 없다. 천통8년은 서기 705년인데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해가 713년이기 때문에 705년에는 발해라는 국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위조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였다. 보관 상태가 좋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금은 철이나 청동에 비해 잘 부식하지 않는 금속이다. 2대왕 대무예(大武藝)의 연호 인안(仁安)이 사서에 나타난 발해 최초 연호다. 그러나 대(大)씨 후예인 태(太)씨 족보에는 대조영의 연호가 천통이고, 1979년 세상에 나타난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도 천통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해 개국 때 국호는 대진(大震, 위대한 동방의 나라)이 확실하나 언제부터 발해라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기 713년에 발해군왕으로 당나라가 책봉했다고 해서 이때부터 정식 국명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발해가 그 국명을 당나라에서 받을 정도로 약한 나라가 아니고 스스로 연호를 쓰는 황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책봉은 무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국가에 대한 외교 수단이었다. 전국의 지도를 그릴 만한 지리 지식이 발해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고구려 영양왕 때 이미 국가 강역도가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합리적인 의심이 될 수 없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위조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다.


  방사성동위원소 검사로 이 금화의 제작연대를 추정하여 쉽게 진품 여부를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재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 같다.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이 금화가 위조품이라면 위조한 사람은 역사에 해박한 사람이다. 특히, 1979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환단고기』의 내용도 알고 있었다고 유추된다. 이후에도 구체적인 검증이 없었고 금화는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서병국 교수도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상당수 강단사학자들은 새로 출현한 유물이 우리에게 불리하면 환호하고, 유리하면 폄하하고 무시해 왔다. 이 금화도 이런 연유로 행방이 묘연해졌다면 언젠가는 다시 출현할 것이다.

글: 허성관(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전 행정자치부 장관)

이 기사는  '한은소식' 2016년 7월호에서 전재된 것을 허성관님의 허락을 받은 것임.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