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게 묻는다, 너는 일제로 부터 해방되었는가?

올해로 광복71주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과연 광복, 해방된 조국인가,

국가 공공기간의 간부가, "천황폐하만세"를 부르짖고,

일제가 우리민족혼을 말살하고자 세운 남산의 조선신궁자리에서

일본 자위대 창설기념대회를 열어도 오히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축하하고 있다...

광복절이 얼마 안 남았다.

조국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고 살을 찢고, 뼈를 묻은 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서기2015년 7월21일(화) 연길→도문(圖們)→두만강→명동촌(明洞村)
두만강에 노 젖는 뱃사공은 없다.
               

답사 2일째인 오늘은 연길을 출발해서 도문, 용정, 화룡을 거쳐 백두산 초입에 있는 이도백하까지 가야 한다. 대략 500km를 달려야 한다. 이 지역은 두만강 건너 만주다. 일찍부터 조선 백성들이 이주하여 일군 땅이고, 나라를 뺏기고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땀과 피와 한이 서린 땅이다. 오늘 답사 주요 일정은 봉오동 전투 전적지, 대종교 3종사 묘소, 청산리 전투 전적지 참배다.

연길에서 동북쪽으로 시골길을 달라다 도문시에 가까운 어느 삼거리에서 중국 경찰이 우리 버스를 세우더니 뭔가를 신고하라고 한다. 중국인 기사가 내려서 처리하고 통과했다. 이상하게도 이번 우리 답사여행을 중국 경찰이 계속 검문해서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지속적으로 지적해온 탓인가? 하긴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부끄럼도 없이 중국 동북공정의 서울지사 역할을 자임하고 우리의 역사강역을 팔아먹고 있는데 비해 한가람이 지속적으로 대항하고 있으니 중국 당국이 주시할 수도 있겠다. 사실 최근 들어 중국이 조용하게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자기네들이 떠들지 않아도 한국의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 알아서 받쳐주고 있으니 떠들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독립국인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연구진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왜 교육과학부는 가만히 있을까? 왜 국회는 동북아역사재단 해체 법안을 내지 않을까? 왜 대한민국 주류 언론들은 여기에 침묵하고 있을까? 2003년 설립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은 일제 총독부가 만든 노예의 역사를 확대 재생산 하고 중국 동북공정을 옹호하는데 3천억 원 이상 국민 혈세를 썼다. 창립 이후 12년 동안 이 재단은 총독부 사관을 극복하고 동북공정의 논리를 반박하는 단 한 편의 논문이나 보고서를 낸 적이 없다. 왜 감사원은 가만히 있을까? 검찰 등 수사기관은 어느 나라 국가기관인가? 이제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재단의 연구원으로 국민의 혈세로 월급을 받고 근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적한 길을 한참 달려 봉오동(鳳梧洞) 초입에 도착했다. 장승 2기가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조선족 미을이다. 오동잎을 먹고 사는 봉황의 동네, 참 근사한 이름이다. 1920년 북만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를 목표로 국내진공 작전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1920년 5월 홍범도(1863-1943) 장군, 최진동(1887-1941) 장군, 안무(1883-1924) 장군은 연합해서 ‘대한북로독군부’ 창설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홍범도 장군은 전설이 된 독립군 영웅이다.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 일대에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성공한 이주민이었다. 그는 재산을 군자금으로 썼다. 안무 장군은 대한제국의 장교였고 국망 후 독립전쟁 일선에 나선 분이다. 이 부대의 독립군이 1920년 6월 4일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다. 일본군이 대대 규모의 부대로 이들을 추격해 오자 6월 10일 미리 매복하고 있던 홍범도, 최진동, 안무 장군이 지휘한 700여 명의 독립군 부대가 이들을 궤멸시킨 곳이 이곳 봉오동이다.

▲ 봉오동 하촌 입구 장승. 정겨운 우리의 산하가 이곳 남만주에 서려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서 처음으로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 일제 정규군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이다. 대일항쟁기 애국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전투였다.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고 무장항쟁이 활발해진 계기를 만든 전투였다. 그러나 일제가 독립군의 실력을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 왼쪽 부터 홍범도, 최진동, 안무 장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이 조국광복투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 생령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봉오동은 골짜기가 30리 정도인데 산이 그리 높지는 않다. 입구부터 하촌, 중촌, 상촌  세 마을이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식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이 골짜기에 저수지를 만들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관리소에서 버스를 통과시켜 댐 입구까지만 갈 수 있었다. 이곳을 수차례 답사한 김병기 박사는 지난번에 왔을 때 ‘봉오동 전적지’라는 표석만 잡초 속에 숨어 있었는데 이제는 동남향으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듯한 기념비를 세워 놓았고 그 뒤에 자태가 멋진 홍송도 심어 놓았다.

어찌 사진만 찍고 스쳐 지나갈 수 있겠는가?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선열들이 순국한 현장이 아닌가! 인천공항에서 준비한 소주와 연길 서시장에서 마련한 대추, 북어, 과일을 차려 놓고 소박하게나마 격식을 갖추어 산화한 애국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봉오동을 떠나 조금 달리자 도문시와 북한을 잇는 두만강 다리가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허술한 교량이다. 다리 길이가 200m 정도 되어 보인다. 오고 가는 차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인 관광객 몇 사람이 북한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있다.

▲ 중국 도문과 북한을 있는 다리, 다리 건너가 북한

이곳은 삼거리인데 우회전 하면 두만강에서 내륙 쪽으로 용정으로 연결되고, 직진하면 두만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명동촌, 용정으로 연결된다. 직진해서 두만강을 따라갔다.

북한과 중국 국경을 구분하는 철책과 함께 두만강을 따라 길이 계속된다.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에 나오는 ‘노 젓는 뱃사공’은 물론 없다. 두만강 하류에 가야 뱃사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강물의 깊이가 무릎에 찰 정도다. 강폭도 100m를 넘지 않는 듯하다. 강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좁은 들을 돌아 흐르는데 강줄기가 중국 쪽으로 흐르면 북한 쪽 들판이 넓고 북한 쪽으로 흐르면 중국 쪽 들판이 넓다. 철책도 별로 높지 않다. 북한 쪽 경계가 얼마나 삼엄한 지 알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탈북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중국 쪽 산에는 나무가 울창한데 강 건너 북한의 산에는 꼭대기까지 나무가 없어 보인다. 대신에, 온 산에 밭을 일구어 놓았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받을 일군 게 아니겠는가. 지금은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지만 낙엽이 지면 북한 쪽 풍광은 그야말로 황량할 것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큰 비가 오면 수해피해도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새삼 정치가 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북한의 산하를 보니 알겠다.

▲ 국경의 철책, 두만강, 건너편이 북한 함경북도

두만강 길을 따라 한 참 가니 간평(間坪)이다. 봉오동 전투에 앞서 강양동을 습격한 후 후퇴하던 독립군과 일제 추격대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독립군들이 퇴각하지 악에 바친 일본군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곳이다. 일본군들이 잘하는 것은 민간인 학살이다.

한 시간 반쯤 달리자 삼합이라는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난다. 삼합 건너편이 북한 회령이다. 삼합에서 우회전해서 조금 가면 명동촌이다. 남북으로 널찍한 얕은 골짜기에 명동촌이 있다. 마을 입구에 명동촌임을 표시한 큼지막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다. 고등학교 시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우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우리 모두가 애송했다. 가슴 저리게 슬프면서도 뭔지 모르는 아련함으로 먹먹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삼십도 넘기지 못하고 시인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서 희생되었지만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지난 4월 일본 동지사 대학을 찾았을 때 이 대학 출신인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를 보고 착잡한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생가를 중심으로 윤동주 시들을 돌에 새겨 죽 전시해 놓았다. 수직으로 세워놓기도 했지만 길에다 평평하게 전시해서 밟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 찜찜하다.

이곳 명동촌은 회령에서 100리다. 1899년 함경도에 살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남종규 네가문의 25세대 142명이 집단으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여 일군 마을이 명동촌이다. 다음 해에 윤하현 가문이 합류하였다. 김약연은 북간도 조선인 자치기관인 간민회 설립 주역이다.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이고 윤하현은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이다. 명동촌은 대일항쟁기 북만주 민족교육과 독립항쟁의 거점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곳 압록강 너머 벽촌에서 자식을 서울로, 일본으로 어떻게 유학 보낼 수 있었을까? 다섯 가문이 일군 토지가 600만평 정도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좋은 땅 1만평을 학전(學田)으로 남겨 여기서 생산되는 수확으로 후세 교육에 충당해서 유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선조들의 빛나는 교육열을 여기서도 본다.

▲ 윤동주 시인의 생가, 집 뒤로 멀리 보이는 오른쪽 바위산이 대락자

영동촌에서 북쪽으로 용정까지 대략 30km이다. 용정 쪽으로 명동촌이 끝나는 곳 오른쪽에  대락자라는 절벽이 직각으로 장엄하게 서서 산과 이어져 있다. 회령에서 고개를 넘으면 대락자가 가깝게 보인다고 한다. 남부여대한 조선 백성들이 두만강만 건너면 조선을 벗어나는구나, 용정이 멀지 않았구나 하고 안도하던 표지석이 대락자였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하려 갈 때  명동촌에  머물면서 이 절벽에 대고 권총 사격을 연습한 곳이라고 한다. 역사가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 것이다. 이곳이 고향인 문익환 목사의 아들 영화배우 문성근 씨도 이 전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락자 근처는 양쪽이 산인 좁은 통로다. 이 통로 근처에서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일제의 만주 근무 공무원 월급 수송 마차를 습격해서 15만원을 탈취했다. 불행하게도 독립자금으로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이들 독립군들은 보름 후에 체포되었다. 책으로 읽기만 해서는 선조들의 피나는 독립투쟁을 현실로 인식하기 어렵다. 현장은 우리에게 항상 감동하게 하고 rkr오를 다짐하게 한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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