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고대사는 두 종류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조선총독부에서 발명한 한국고대사와 다른 하나는 이를 비판한 독립운동가들의 고대사이다. 그런데 두 관점이 가장 극명하게 충돌하는 부분은 두 분야다. 하나는 한사군의 위치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임나일본부 부분이다. 윤내현 단국대학교 명예 교수는 한사군의 위치부분에 대해서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가 논문과 저서를 발간할 때마다 잇단 시비가 일었다. 그간 한국 고대사학계는 조선총독부 관점의 한국 고대사를 정설(定說)로 가르쳐왔는데,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윤내현 교수가 한사군 문제만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사군 문제는 곧 고조선과 관련된 문제이고 고조선은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래서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과 기자, 한사군 등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조선총독부의 주장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간 한국 고대사학계는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한강이북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윤내현 교수는 한사군이 중국 하북성의 난하(灤河)와 요녕성의 요하(遼河) 하류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고대사가 아니다. 한사군의 위치가 한강 이북이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가 맞다는 뜻이 된다. 곧 유사시에 중국이 북한 강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셈이다. 반면 윤내현 교수의 주장대로 한사군이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다면 중국은 동북공정을 주장할 추동력을 잃게 된다. 동북공정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고대사 분야에서 조용히 손을 뗄 가능성이 높다.

윤내현 교수는 정설을 고집하는 고대사학자들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들었다. 이런 비난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른 나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이 나라에서는 지금껏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모두 광복 직후 철저한 친일청산을 단행해서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때문이다. 그간 윤내현 교수의 노력 덕분에 한국사가 조금 나아졌다. ‘단군신화’라는 말이 사라지고, 교과서에 고조선의 건국기원이 서기전 2333년이라는 기술도 들어갔다.

 

한국고대사의 두 종류 역사관 : 조선총독부 vs 독립운동가

 

그러나 지금 한국사는 또 다시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이번에는 나랏돈을 쓰는 역사관련 국가기관들이 한국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2009년 교과서에 다시 단군신화라는 말이 등장했다. 지난해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나랏돈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조선총독부가 주장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묘사한 영문판 역사서를 출간한 사실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국고 47억 원을 들여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했는데, 중국 동북공정 지도와 쌍둥이 지도였다. 한사군의 위치는 조선총독부에서 지시한 대로 그렸고, 서기 4세기에도 신라와 백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렸다. 또한 독도는 일관되게 지워버렸다. 역사학에 관한 한 나라가 망하던 한 세기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한국사 왜곡을 주도했던 조선사편수회가 다시 나타난 듯한 상황이다.

노학자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는 10년째 ‘파킨슨 증후군’으로 투병 중이다. 한 번에 긴 시간을 할애해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최근에 만나 나눈 이야기를 비롯해서 80년대 초부터 만나 나누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다시 본인에게 확인하여 정리했다. 치료가 쉽지 않은 병인지라 운동 능력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기억력과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설명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 중국 상고사를 연구하다가 한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연구한 이유는?

“고대사는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중국이나 일본도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대사를 가장 먼저 왜곡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바로 고대사 부분이다.

이런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대사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 같다. 1978년 미국 하버드대학 대학원 동아학과에서 연구를 하던 중 우리나라에 처음 중국문화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기자(箕子)에 관한 북한과 중국의 연구 자료를 보게 되었는데, 국내 학자들의 학설이 명확하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상 왕조사의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기자는 조선에 봉해졌지만 상나라 조선현감에 봉해진 것이므로 우리나라 고조선의 왕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국사학계에서 전혀 반응이 없어서 이 부분을 좀 더 연구하여 1982년에 한국사에 대한 첫 논문 ‘기자신고’(箕子新考)를 발표했다. 당시 국내학계에서는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선진문화를 전해주었다는 기자동래설(기자동래설)과 기자는 오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두 학설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 논문 발표 뒤 상당한 논란이 일었고, 주류 학자들의 비난도 거셌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학설이 당시의 두 가지 주장과 다르다 보니 고조선사에 기자를 넣어야 할지 넣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가 발생됐다. 그러던 차에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라고 권하여 1984년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됐다. 이기백과 함께 이병도의 수제자로서 광복 후 우리나라 고대 사학계를 주도하던 김철준 교수가 발표 전에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말했으나 농담인 줄 알고 준비한 대로 발표했다. 그런데 토론시간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젊은 사람이 선배 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른다.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었다. 학자는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 본분인데 ‘선배 교수들에 대한 예의’를 더 중시하는구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일제가 조직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해 한국사를 왜곡한 책임이 있는 이병도의 식민사학에 예의를 지키라고 요구하니 일제의 학설이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윤내현 교수는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국 학문계는 상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도그마, 그것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도그마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윤내현 교수는 “학자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서기를 계속해야 한다.”면서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라고 토로했다. 한국에는 아주 소수의 학자들 외에는 이런 학자가 없다. 학문을 집단으로, 떼거리로 한다. 자신들과 견해가 다르면 떼거리로 죽이려고 달려든다. 그나마 이런 떼거리 학문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거나 민족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조선총독부 사관을 지키기 위해서 떼거리로 달려드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활동이요, 막가파식 폭력집단이다.

한배달 박정학 회장이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의 일이다. “선생님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해야겠다.”고 윤내현 교수와 통화를 했다. 오히려 윤내현 교수는 “학자는 자신의 주장이 깨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학문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학들에 의해 내 주장이 틀렸다는 연구가 많이 나오면 우리 국사학계는 제대로 발전하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 그런 상황에서도 고대사 연구를 접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는 기자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한국사에서 손을 떼려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물러서면 내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여질 것 같아 그 뒤로 중국사를 제쳐두고 한국 고대사 연구에 집중했다.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경, 사회구조, 통치조직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윤내현 교수는 “기존 고대사학계와 다른 견해를 발표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 이었다”고 토로했다. 윤내현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하던 1980년대 초반 국내 고대사학계는 고조선의 강역을 대동강 유역의 아주 작은 정치세력이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아직 국가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부족국가라는 것이었다. 윤내현 교수가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하는 큰 나라였다고 서술하자 강한 인신공격성 비난이 쇄도했다.

윤내현 교수(좌측)과 사단법인 한배달 박정학 회장(우측) 사진 세계일보 남정필 기자 제공

- 1981년도에 국회에서 국사교과서 관련 공청회를 개최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였던 이종찬 의원이 주도한 공청회였다. 재야사학자들과 강단사학자들이 국회공청회에서 맞붙은 것인데, 이 공청회는 거의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재야사학자들과 강단사학자들의 견해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당시 국회 국사공청회를 어떻게 평가하시나?

“민족사 교육을 바로잡으려는 의욕은 높았으나 안호상, 문정창, 임승국 등 이른바 재야학자들이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제도권에서 위서로 몰려있는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주장했으므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학문적으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도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고, 근래에 이도상, 김종서, 이덕일 등은 물론이고 박정학 회장도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지금 그런 공청회가 열린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아마 조만간 이런 공청회, 공개토론회, 국사교육심의회 등이 다시 개최될 것으로 생각한다.”

윤내현 교수는 여전히 낙관론자다. 그간 숱한 음해로 세상을 비관할 만 한데도 여전히 낙관론자다. 1980년대 윤내현 교수가 재직하는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윤 교수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였다.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고대사학계는 윤내현 교수의 학설에 대해서 ‘소설’이라는 식으로 매도했다. 자신들은 사료에 기초한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1981년 국회 공청회 때 재야사학자들은 관점은 올발랐지만 1차 사료를 다루는 전문적인 역사학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윤내현 교수의 말대로 여러 사람들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역사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1차 사료에 바탕을 두고 기존 고대사학계, 즉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기존 고대사학계야 말로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는 ‘소설’을 써왔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 대해서 기존 고대사학계는 단 한 번도 이들이 요청하는 공개적인 학술토론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 1986년의 국사교육심의회 활동을 이야기해 달라.

“그 무렵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하는 ‘한국사휘보’에 ‘윤내현은 북한의 어용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라는 내용이 실리고, 정보기관에 ‘고대사 분야에서 북한학설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고 신고가 들어와 불려가서 조사까지 받았다. 내가 자신들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밝히는 연구를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짓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한배달 계간지 편집회의 때 만났던 한 언론인과 인연이 되어 많은 글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기존의 고조선에 대한 서술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해 11월쯤 ‘국사교과서심의회’가 구성됐다.

심의회에서 근거사료를 철저히 제시하며 고조선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발표를 했는데 회의록을 보자고 했더니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하더라. 자신들이 반박을 못해서 불리하니 기록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으니 심의회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어 심의회가 해체되기 전에 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내가 기존 학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주류 학자들이 제대로 반론을 펴지 못하자 임시 사회자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적당히 양보하자’는 얘기도 했으며, ‘너무 획기적으로 바뀌면 국민들이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등의 비학문적 발언도 있었다. 학문에 무슨 흥정이 있는가? 내 주장이 틀렸다면 틀린 점을 지적하고, 옳다면 수용하면 된다. 학자의 본분을 상실한 학자들이었다.”

 

윤내현 교수는 정보기관의 조사까지 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윤내현 교수가 북한 학설을 유포하면서 학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 정보기관에 조사를 요청한 곳이 바로 ‘학계’였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을 형사 및 민사로 고발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학문적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자는 주장은 무시한다. 자기들끼리만 이른바 학술토론을 한다. 그러다가 자신들과 다른 주장, 즉 조선총독부 주장과 다른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나타나면 죽이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한다. 인터넷에 숨어서 온갖 음해성 글을 올리는 것은 기본이다. 학자의 양심을 팽개치고 마치 간첩신고라도 하는 것처럼 정보기관으로 달려간다. 윤내현 교수도 이종찬 의원이 없었다면 조사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정보기관으로 달려갈 수 없으니 검찰청으로, 법원으로 달려간다.

 

- 북한 및 일본 학자들과도 교류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북한 학자들은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역사에서도 주체적 시각을 갖기는 하지만, 김일성의 교시를 뛰어넘지 못하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일본 학자들 중에는 과거 일본 군대가 역사를 왜곡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수위 이상의 주장을 하면 우익들에 의해 테러를 당할 위험이 있어서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시아의 역사는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해석해야 하고, 우리 역사도 우리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접국 학자들과 교류가 필요하지만 각자의 사정에도 한계가 있음을 실감했다.”

 

윤내현 교수는 또한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사 연구>를 베꼈다는 음해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윤 교수는 한국고대사의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등)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비슷한 견해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고대사학자들은 북한과 ‘부분적으로 비슷한 견해’를 북한을 추종하는 것으로 몰아서 신고했던 것이다. 북한의 리지린은 1950년대 말 북경대에서 의고변파(擬古辨派)의 중심인물인 고힐강(顧頡剛)에게 사사하며 고조선사를 연구했다. 그런데 고힐강은 중국 당국에 리지린의 고조선사를 연구하게 하면 안 된다고 신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리지린은 중국의 25사를 비롯한 중국 고대사서를 중심으로 고조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고힐강은 ‘이를 허용하면 중국이 만주를 계속 차지하는데 장애요소가 될 것’이라면서 연구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상부에 신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북·중관계가 혈맹이었기 때문에 상부에서 연구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리지린의 <고조선사 연구>는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 서쪽까지 걸쳐 있었다는 주장이다. 윤내현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리지린도 이런 내용을 중국 고대 사료에서 찾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점은 같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일례로 리지린은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2천리 강역을 빼앗기고 난 후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을 지금의 대릉하로 보지만 윤 교수는 난하로 본다.

 

- 선생님을 재야사학자로 부르는 시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제의 단군신화론이 한국사학계의 정설로 되면서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뿐이었다. 광복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고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각주가 거의 없이 일본인들이 연구한 기자, 위만, 한사군 한반도설을 복창하던 이병도 등의 주장에 대해 철저한 사료적 근거를 토대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 난하 근처에 있었다고 밝히자 그 내용이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비슷하므로 주류 학계에서는 재야사학자로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학에서 보면 학문적인 사고와 방법을 사용하는 강단사학자다. 대학교수 중 안호상, 임승국, 박시인 등이 바른 주장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역사학 교수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의 시각을 따르는 선배의 학설조차 비판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고대사 분야에 젊은 학자들이 없고, 있어도 선배의 연구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연구는 아예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식민사학 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국사학계에서 학위나 강사자리 하나 얻지 못하여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배 학자들의 잘못을 꼬집은 나는 강단 국사학자는 아닌 셈이기도 하다.”

 

소위 고대 사학계에서 학자를 분류하는 방법은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역사학으로 학위를 받지 않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재야사학자라고 분류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학자군이 등장했다. 그러자 고대사학계, 즉 식민사학계는 새로운 분류법을 내놓았다. 조선총독부 관점에 동조하지 않는 학자들은 모두 재야사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윤내현 교수 등도 재야사학자가 된 것이다. 최근에는 유사역사학이란 용어까지 또 발명했다. 조선총독부 관점에 동조하지 않는 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라 유사 역사학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총독부 세상에 산다.

 

- 학술 서적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책도 내셨다.

“사실 학술적인 내용만 발표하고 한국사에서는 손을 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이 읽기 쉬운 책을 좀 써 달라’는 출판사의 요구가 있어 몇 권을 출판했다. 그런 대중 역사책을 쓰면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중들이 우리 역사를 알고 우리나라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지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애국심이라는 걸 별도로 교육할 필요가 없다. 어릴 때부터 바른 역사를 알고 민족에 대한 생각을 키워줄 수 있도록 부모가 아이에게 얘기해주는 그런 쉬운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 절실히 느꼈다. 학문적인 논리가 아니라 대중들을 이해할 수 있는 책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러면 대중들이 움직이게 되고 그 힘이 제도권에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 교수가 경험했던 학계의 현실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서 나눴던 이야기에는 자신의 힘들었던 경험이 무의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하는 원인과 대책을 들어봤다. 

 

- 요즘 우리 사학계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왜 이렇게 되었다고 보시나.

“일제가 만든 조선사는 우리나라 사람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그런 조선사 편찬에 참가했던 스승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만한 학자들이 그것을 비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한문 실력이 모자라서이건 학계의 분위기 때문이건 학자들이 진실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정부가 남북 분단 이념대립 문제에만 관심을 쏟다보니 역사의 핵심을 놓친 점도 다른 이유가 된다. 또 일제 때 호의호식했던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공부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아 관계(官界)로 진출을 많이 했고, 그들이 정부 정책과 예산의 칼자루를 쥐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특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들이야 강하게 부인하겠지만, 우리 학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우익들의 드러나지 않는 음모에 농락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친일파 후손들에게 자기 선조의 명예회복을 부추기면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본 우익들과의 연결과 관련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인 박성수 교수는 2014년 한배달이 주최한 국사바로잡기 간담회에서 “내가 일본인의 돈을 받은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 어떻게 해야 우리 역사학계를 바꿀 수 있을까.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만남이다. 이때 중요한 게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남 자체에 역동적 힘이 생길 수 없다.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게 급선무다. 그래서 우리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면서 세계적 보편사와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런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가 제도권 학자들에 휩쓸리지 말고 다양한 연구자들이 서로 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 제도권 학자들도 선배 학자들에 매달리지 말고 비판을 하고, 비판하는 이론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윤내현 교수는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윤 교수를 비롯해서 조선총독부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사관 확립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공통점은 열린 학문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사에 대한 애정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배타심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자들은 윤 교수 같은 이들을 국수주의로 몰았다. 속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사관을 추종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신들의 역사학이 민족주의 역사학인 것처럼 대중들을 속이다가 이제 그 실체가 드러나니까 민족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식민사학의 공격이 거칠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현재 파킨슨씨 병을 앓고 있는 윤내현 교수 살아생전에 조선총독부 사관이 사라지고 사료에 기반한 진짜 역사학이 이 땅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부디 그런 날이 하루바삐 오기를 바란다.

투병중에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는 윤내현 교수

대담 박정학(사단법인 한배달 회장), 정리 임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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