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세력을 '청산'한 친일파, 대한민국을 장악하다.

기사수정: 서기2016.7.9. 15:08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적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

(춘원 이광수, <매일신보> 서기1940.9.4.)

 

섭씨30도가 넘어가는 기나긴 무더운 여름날이다. 주르르 땀이 흐르는 더위도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가니, 조국광복의 그날이 다가온다. 타는 듯한 여름이 마지막으로 치닫던 어느 날, 8.15 광복이 찾아왔다. 영원히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 줄 알았는데 ‘조국’ 일제가 한 순간에 망해 버렸다. 바로 어제 까지 시퍼렇게 날뛰던 친일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쥐 죽은 듯이 숨어 심판 받을 날 만 기다렸다. 조선총독부는 자치조직인 조선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고자 여운형 세력을 맞이했다.

그러나 분단이 고착화 되고 미국 군정이 실시되고 이승만에게 권력이 기울어지면서 숨어 있던 친일파가 하나 둘 씩 기어 나와 대한민국의 상층부 권력을 모두 장악해 버렸다. 그리고 청산당해야 할 친일파가 피를 뿌리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세력을 '청산'해 버렸다. 백범 김구가 피격되었고, 여운형이 죽임을 당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장, 김원봉은 악질 친일파 고등계 형사, 노덕술의 고문에 못 이겨 북으로 탈출했다. 일제도 못한 일을 일제가 키워놓은 친일파가 해낸 것이다. 일제침략의 한복판에서 희생 된 것이 아니라, 일제가 물러간 자리, 광복된 조국 땅에서 일제의 하수인들에게 ‘청산’ 당했다.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가 대를 이어 대한민국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다시 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있다.

7월 8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가톨릭 청소년회관에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다음카페가 주최한 친일파의 반역행위에 대한 고발강연이 있었다. 친일파 실체 고발의 제2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정운현 선생이 ‘역사왜곡과 친일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정운현 선생은 ‘왜구난동기’하에서 일제에게 붙어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파의 역사를 추적해 들어갔다. 서기1876년 일제에게 개항을 당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친일반역행위를 한 자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소중화 조선 정권이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이유를 친일파의 반역행위에서 찾았다. 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 배에는 친일파 김인승이 타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정을 잘 아는 김인승이 일본에게 유리한 조약체결의 모든 전략을 짜주었다고 하였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지정한 친일파로 등록되지는 못한 박정희의 반민족행위 증거기사. 정운현 선생은 위 위원회 활동이 중단된 이후에 박정희의 친일반민족행위증거나 나타나서 등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 사명대사기념비를 네 조각 낸 친일파 승려, 변설호를 들었다. 변설호는 해인사 승려이면서도 임진왜란 당시 전쟁 후 포로 송환사로 일본에 건너간 사명대사가 풍신수길을 모욕한 것을 기억해 당시 합천경찰서에게 알려 철거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철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비석을 네 조각내서 경찰주재소의 정문 디딤돌로 쓰도록 하는 등 잔인한 짓을 하였다.

세 번째로 친일파 춘원 이광수를 드러냈다. 작가의 수려한 필체를 반민족행위를 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한 때 ‘도쿄2.8’ 독립선언문도 작성하는 등 애국행위를 했지만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 되면서 조국 독립의 가능성이 옅어지자 친일반역자로 돌아선 것이다. <개벽>등 출판물에 ‘민족개조론’을 설파하며 적극적으로 친일반민족 행위에 뛰어 들었다.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라고 하여 가지고 있는 작가적 필력을 모두 동원할 정도로 반민족역적행위에 적극적이었다.

네 번째는 일본이름, ‘다까기 마사오’로 알려진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를 지목했다. 대구사범학교 제1호로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박정희,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염원했다고 하였다. 박정희는 원래 일본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입학할 나이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혈서까지 쓰면서 충성맹세를 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 정신과 기백의 일사봉공으로 굳건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개와 말처럼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만주신문, 서기1939.3.31.).”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2년을 졸업한 후 다시 일본육사 본과에 진학하여 제57기로 졸업하였다. 철저히 일본의 ‘혼’을 새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후 만주군 보병8단에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일본군 중위로 해방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정운현 선생은 이어 해방 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반역자 처단을 시도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함으로써 좌절 되었다고 하였다.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세워진 ‘반민특위’가 경찰을 장악한 친일파의 공작으로 와해되자 친일 반민족자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졌음을 밝혔다. 그리고 친일파가 우리나라 상층부를 모두 장악함으로서 반민족 수구세력이 대물림과 동맹 체제를 구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면서 영구집권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 왜구는 춘원 이광수의 말처럼 이마빡을 찌르면 일본인의 피가 흐를 정도로 우리민족을 철저히 왜구화 시키고자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움으로써 우리민족 지우기에 광분했다. 사진은 남산에서 내려다본 왜구(일제)의 조선신궁이다. 서기1945.8.15.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성난 생민들이 '조선신궁'을 파괴할 것을 미리 알고 자진 해체하여 '신성한 신궁'을 지켰다.

그렇다면 왜구난동기 친일반역행위를 한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약 20만 명으로 추산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노무현 정권 들어 반민특위의 부활이라고 여겨지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1006명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독립유공 포상자는 14,329명 정도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프랑스가 나치 협력자를 처단한 사례와 비교하였다. 프랑스는 나치협력자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일반법원에서는 6700명을 처형했고 2700명을 종신 강제 노동형에 처했다. 지방법원에서는 3000명을 사형시켰으며, 시민법정에서는 9만5천명을 ‘비국민’판정을 내렸다. 이는 선거권 및 공직진출권을 박탈한 것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한 나치 치하에서 15일 이상 발행된 신문의 사주와 경영자를 처단하고 재산은 거두어 국고로 귀속 시켰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된 서기1905년부터 서기1945년까지 직접적인 일제난동기라고 볼 때, 우리나라의 친일반역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 처단은 거의 전무한 상태라고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총체적 모순과 비리는 친일반역자 처단을 못함으로써 나라기강이 무너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정운현 선생은 친일파 청산을 못한 것을 수백 년 전의 무덤에서 나온 미라로 비유했다. 때가 되면 섞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좋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일파도 때가 되면 청산되어 사라져야 하는데, 광복70년이 지났어도 친일파는 대를 이어 더욱 강고해졌고 이제는 영구집권까지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친일반민족 발언과 행위를 친일파 청산을 못한 후유증이라고 했다. 서기2005년 전 고려대 교수 한승조가 일제식민지 시대를 찬양하고 얼마 전에는 국책기관의 간부인 이정호가 “천황폐하만세”를 부르고, 국무총리 후보로 나온 문창극의 발언을 예로 들었다. 또한 뉴라이트라는 집단으로 뭉쳐서 일제식민지시대를 찬양하는 교과서를 내놓고 대통령까지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 것을 상기시켰다. 마지막으로 정운현 선생은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총독부건물이 있던 자리인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고 남산중턱에 일제의 조선신궁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를 세우라고 촉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번 행사는 정운현 선생이 최근 펴낸 <묻혀있는 한국현대사> 책 출판기념강연으로 기획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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