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식민사학의 주장에만 귀 기울이는 '역사비평'의 비이성적 행위...

강단주류사학은 특히 고대사 부분에서 일제식민주의 사관을 그대로 추종...

일제 조선총독부의 '스다쇼키치'의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 여전히 고수하는

한국고대사학회...

 

2. 위가야 씨의 비판에 대해서

다음에 위가야 씨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이가?」에서 조선 후기의 한백겸·유득공·정약용·한진서 등 학자들이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미 주장했으며 식민사학의 창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익 선생의 요동설은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으나 일제가 만든 조선총독부 사관에 맞서 싸운 신채호·정인보 선생 등의 학설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위대한 학자인 것처럼 추앙하다가 그들이 신처럼 추앙하는 일본인 학자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명목상 학자이며 조선총독부의 앞잡이인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조선시대로 도망가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반민족적 식민사학을 옹호하기 위해 조상들까지 욕먹이는 것은 후손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정약용도 『강역고』 「조선사군」에서 말한 것처럼 그 당시에도 한사군과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평양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한반도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었다면,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어느 쪽이 옳은 지를 판단해야 한다. 위가야나 강단사학계에서 정약용의 설이 일제 식민사학의 설과 같다는 것만 강조할 뿐 정약용이 말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묵살하고 있다.

중국의 1차 사료는 거듭 거듭 낙랑군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경량이나 위가야는 중국 1차사료의 이런 기사를 근거로 세운 주장을 비판하려면 사료를 제시해야 한다. ‘낙랑군=평양설’을 입증하는 사료가 단 한 개도 없자 조선학자들로 도망가고, 글자 없는 고고학으로 도망가서는 “너희들은 모두 사이비, 유사야!”라고 우기는 것이 작금 강단 식민사학계가 보여주는 행보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연구(만권당)』에서 수많은 중국 사료를 근거로 한사군 한반도설이 문헌적 근거가 단 하나도 없다고 비판하며 요서설을 주장한 것이다. 위가야나 기경량이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연구』를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독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정독하고 분석했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했다면 그것은 양심의 문제가 뒤따르는 것이다. 일체의 1차 사료적 근거 없이 고고학 유물만 가지고 일방적 주장을 일삼는 강단사학계가 사이비인가, 1차 사료에 입각한 민족사학계가 사이비인가?

▲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 중의 대표적인 학자, 스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 그는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이 거짓이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냈다. 중국의 삼국지를 갖다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역사를  부정했다. 이유는 우리나라 남부에 일본식민기관, 임나일본부를 존재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한국고대사학회'가 그대로 추종하고 있고, 김현구씨가 고소한 명예훼손사건 1심재판에서 이기자, 지난 3월 부터 식민사학을 퍼뜨리며 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도 그대로 퍼뜨렸다. 우리나라에 식민사학을 뿌리내린 장본인으로 알려진 두계 이병도는 일제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우리역사 날조 왜곡에 힘을 보탰고,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위 스다소우키치에게서 배웠다(편집부).

위가야는 강단사학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했는지 “‘한사군 한반도설’은 처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파악한 중국사서의 주석가들 이래 ··· ”라고 한 서술했는데, 이 역시 거짓이다. 역도원의 『수경주』를 가지고 아전인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수많은 주석가들은 모두 한사군을 고대 요동으로 파악했지 한반도 내로 파악하지 않았다. 중국의 1차 사료나 여러 주석가들이 한사군을 한반도로 파악한 사료들이 있다면, 그런 근거들은 왜 버려두고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으며 이병도처럼 1차 사료만 조작하겠는가?

중국의 여러 주석가들은 낙랑 등 한사군을 한반도가 아니라 일관되게 대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이병도가 조작한 『산해경』의 예를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산해경』에 열양(열수의 북쪽) ‘동쪽’에 조선이 있다고 한 기록을 이병도가 열수의 ‘남쪽’으로 조작한 사례를 앞에서 보았다. 이병도가 사료 조작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차 사료만이 아니라 주석서도 일관되게 열수가 반도에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3세기 경 진(晋)나라의 주석가인 곽박(郭璞)은 낙랑군 열구(열수의 하구)에 대해 『산해경』을 인용해 “열(列)은 강 이름이며,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주석했다. 1차 사료인 『산해경』에 열수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다고 한 것을 인정하여 곽박도 그렇게 주석한 것이다. 이 열구에 대해 또 『사기색은』에는 소림의 말을 인용해 “현(縣) 이름으로 바다를 건너면 가장 먼저 이르는 곳이다.”라고 주석했다. 여기의 ‘바다’는 앞에 본 『사기』「조선열전」의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라고 한나라 수군이 출발한 후 당도한 곳이다. 즉 발해 서안을 말한 것인데, 열수가 한반도의 강이 아님을 앞에 보았으므로 그 입구인 열구 역시 한반도가 될 수 없다. 중국의 1차사료는 물론 주석서도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만 더 예를 보겠다. 낙랑군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에 둔 것이다. 이 왕험성의 위치에 대해 중국의 여러 주석가들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후한(後漢) 때 주석가인 응소(應劭)는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말했다. 강단사학에서 대동강 남쪽에 있었다고 우기는 낙랑군 조선현이 요동군 험독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요동은 고대 요동인데, 지금의 요동이라고 쳐도 대동강 유역이 아닌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4~5세기 때 인물인 동진(東晋)의 서광(徐廣)은 ‘창려군 험독현’이라고 말했는데, 창려군은 현재 하북성 소속이다.

시대에 따라 군의 이름이 달라졌지만 낙랑군 조선현 자리에 있었던 험독현은 창려든 요동이든 한반도의 평양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유송(劉宋:420~479)의 신찬(臣瓚)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 패수의 위치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춤을 추고 있는데, 물론 모두 한반도 내로 비정하고 있다. 만약 패수가 한반도의 압록강(쓰다 소키치 및 노태돈의 설), 청천강(이마니시 류, 이병도), 대동강(이나바 이와키치, 역도원)이라면, 왕험성이라는 평양이 그 동쪽에 있을 수 없고 남쪽이나 북쪽에 있어야 한다. 동서로 흐르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동쪽이면 강인데, 강 위에 무슨 왕험성이 있겠는가? 물 위에 기둥을 세우고 세운 수상성(水上城)인가?

이런 예만 보아도 중국의 1차 사료들이나 주석자들이 한반도 낙랑군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필자는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에서 낙랑·위만조선 및 그 전의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근거로 위와 같은 사료를 30개 이상 열거한 바 있다. 위가야 씨는 1차 사료나 주석자들이 한사군을 한반도로 파악한 근거를 단 하나라도 제시하기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식민사학을 맹종한 이병도 씨 이후 젊은(?) 위가야 씨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반도사관이 매국적 사학이며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역사를 왜곡, 날조한 주범 중의 하나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그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문물은 없다며, 정체성론을 주장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선진문물은 한국 것이 아니라 한땅(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으로 들어온 중국의 선진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이른바 '교량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량론을 전 고려대 교수, 김현구씨가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라는 그의 책에서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비판한 한 민족사학자를 김현구씨가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고소하여 현재 2심 재판 중에 있다(편집부).

3. 안정준 씨의 비판에 대해서

세 번째로 안정준 씨는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요 근거로 유물·유적을 들며,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연구에 그런 공식은 없다.”고 말한다. 문헌 사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인데, 모든 문헌 사료가 낙랑군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으니 문헌사료보다 고고학이 우선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어찌 젊은 역사학도로서 기초적인 역사학적 방법론까지 무시하고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강단사학에서 태두로 신봉하는 이병도 씨 조차 일찍이 ‘유물은 항시 굴러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문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만약 천 년 뒤 지금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의 유물이 쏟아진다면 21세기 인천이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안정준 씨는 광개토대왕비가 ‘1,600년간 왕릉 주변에 서 있는 것’ 이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에, 유물·유적을 1차적 판단근거로 삼고 문헌사료도 함께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광개토대왕비를 일제가 옮겼다거나 비문을 변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여기서 접어두더라도, 광개토대왕비는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식민사학의 주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일제가 평양 지역에서 발굴한 70 기의 고분과 광복 후 북한에서 발굴한 무려 2,600 기의 고분이 모두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증거하는 듯이 거짓말을 하는 데 있다.

북한에서는 2,600 기에 대한 조사 결과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그런 유적 발굴현장을 보지도 못한 안정준이 북한의 발굴결과를 부인하면서 거기서 나온 몇 가지 유물만을 자의로 취사선택해 가지고 낙랑군의 증거로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북한 측의 상세한 보고서를 먼저 충분히 반박한 뒤에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야 할 것인데, 그런 과정도 없이, 더구나 자기가 유적, 유물을 전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몇몇 유물을 편리하게 자신의 입장에 꿰맞추어 견강부회하는 것이 비학문적 방식임은 굳이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북한의 조사결과를 부인하면서도 몇 가지 유물만을 자의로 취사선택해서 우기는 이런 행태야 말로 ‘사이비’이자 ‘유사’ 역사학이다.

젊은 학자들이라니 차제에 인생의 선배로서 한 두 마디 덧붙이고 싶다. 첫째, 역사학의 장점은 무엇보다 큰 틀을 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 큰 틀로 보면 세 젊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관점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 틀 내에서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세워도 모두 이 나라를 영구히 점령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복무하는 것이 된다. 둘째, 남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필자는 수 십 년 이상 역사문헌을 봐왔고 웬만한 사료는 이제 외우다시피하는 형편이지만 아직도 역사학은 쉽지 않다. 그대들이 썼다는 논문이 논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수준 미달이라는 것은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대들의 선배교수들이 논리에 자신이 있다면 왜 직접 나서지 못하겠는가? 짧은 지식으로 한참 공부해야 할 나이에 남의 공격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쓴 그 글들이 나중에 그대들 발목을 잡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하는 충고다.

셋째, 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왜 역사학을 하는지, 왜 사학과를 선택했는지 초심을 돌이켜보기를 바란다. 아마도 처음 사학과를 선택했을 때는 아직도 이 나라 역사학계를 짓누르고 있는 조선총독부 사관의 앞잡이가 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이 얼마나 정도에서 이탈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누구를 비판해야 하는지도 자연 깨닫게 될 것이다. 정도를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끝).

 

황순종, 고대사연구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해서 과학기술부 등에서 28년 동안 근무했다. 미국 디트로이트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다. 평소 역사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중국의 원 사료들을 오래 강독했다.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와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이 있다. 최근에는 고려대 김현구 명예교수의 식민사관을 실명으로 비판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만권당)』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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