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아버지


"오후에 영희와 정선, 태웅을 데리고 동물원에 갔다. 소풍 삼아 아이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쏘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얼추 2시 30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정선은 조랑말 타기를 즐겼다."

"오늘 오후에도 영희와 정선, 태웅을 데리고 동물원에 또 갔다. 아이들이 소풍놀이를 즐거워하는 것 같다. 4시 30분쯤 집에 돌아왔다."

 


얼마나 자상한 아버지인가. 모처럼 자녀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갔는데, 얼마 안 되어 비가 내리는 거라. 아이들이 참 속상했겠다. 자상한 아버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아이들의 아쉬움을 달래주러 다음 날에도 동물원으로 출동한다. 오전에 잠시 흐렸던 날씨가 오후부터 맑아지니, 아이들의 얼굴도 덩달아 ‘맑음’이다. 행복해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마음이 무척이나 흐뭇했겠다. 이렇게 가정적인 아버지라니!

게다가 주말도 아니고 평일이다. 앞의 일기는 수요일, 뒤의 일기는 목요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3월의 끝자락(30일과 31일)에서 이틀 연속 아이들을 데리고 봄맞이 소풍을 나간 것이다. 휴가철이 아니다. 아, 물론 휴가철이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휴가를 냈을 수도 있다. 자상하고 가정적인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를 수용하기에는 우리나라 직장문화가 녹록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필시 ‘일’이 없는 게 분명하다. 평일에 자녀들을 데리고 동물원 나들이를 가는 삶의 여유 혹은 사치를 즐길 수 있으려면, 적어도 아버지가 생계형 노동에서 해방된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

이 아버지, 사실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일기를 보면, 엄청 바쁘게 산다는 걸 알 수 있다. 만나는 사람의 범주도 다양하고, 다니는 지역의 범위도 전국구를 넘어 해외를 제 집 드나들듯 한다. 다만 입에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생계벌이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마냥 먹고 노는 사람은 아니다.

누구인가. 바로 윤치호(1865-1945)다. 이십대부터 평생에 걸쳐 장장 60여 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그것도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영어로 쓴 친일파 엘리트 말이다. 위의 일기는 1938년에 기록된 것이다. 그의 나이가 칠순을 훌쩍 넘겨 이미 할아버지 반열에 들어섰을 때다. 일기에 등장하는 영희와 정선은 윤치호가 셋째 부인 백매려에게서 낳은 여덟 째 딸과 여섯 째 아들을 가리킨다. 각각 1926년생, 1928년생이니, 열두 살(영희), 열 살(정선)이라는 뜻이다. 이들도 충분히 늦둥이이지만, 그 밑으로도 자식이 더 있으니, 윤치호의 정력은 알아주어야 한다. 한편 태웅은 외손자다. 역시 백매려가 낳은 셋째 딸 문희의 아들로, 윤문희의 남편은 도쿄제대 법학부를 나와 서울 법대 교수를 지낸 정광현이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1938년이면 바로 전 해에 일어난 중일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다. 10만 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일본 군대에 의해 야만적으로 짓밟힌 ‘난징대학살’ 소식에 조선인들의 간담이 서늘해졌을 무렵이다. 그런 와중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녀손을 거느리고 꽃놀이를 간다.

친일파의 일상은 철저히 역사적 콘텍스트와 유리되어 있다는 게 특징이다. 자식들이 징용으로 끌려가고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노심초사 하는 일은 힘없는 민초들의 몫일 뿐, 힘있는 친일파의 경험은 결코 아니다. 친일파 가족은 역사의 요동치는 물결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시절을 가늠할 수 없게끔 철저히 ‘진공포장’되어 안전하고 안락하게 태평세월을 보내는 것,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일상은 그랬다.

윤치호(1865~1945)

글 구미정(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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