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우리 고대역사의 새 지평을 열다...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은 하북성 창려지역이다.”

“고구려의 개국지, 졸본은 하북성 의무려산 근처다.”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요녕성, 요양이다.”

“고려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요하, 동북으로는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다.”

“이성계가 회군한 압록강은 요하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주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 등 우리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역사의 강역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17일 새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모두 11명의 발표자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문헌사료 뿐만 아니라 교통, 환경, 기후 및 천문학, 지리학 등이 동원되어 입체적, 종합적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첫 발제자로 나선 전 동아일보 기자 이정훈 씨는 ‘고구려 외교사로 본 고구려의 흥망’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이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고증하였고 여기서 고구려가 나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개국지인 졸본이 의무려산 일대라고 하는데 이정훈씨는 고구려가 나온 현도군을 요동으로 봄으로써 고구려 개국지의 위치에 근접했다는 평가다. 이씨는 신라와 돌궐 등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잘 한데 반해 고구려는 당나라와 외교를 못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보아 눈길을 끌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단국대학교 김철웅 교수는 소중화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평양의 위치를 밝히려 하였다. 특히 서기1488년 윤1월에 제주도로 가다가 난파되어 명나라 해안에 표착한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과 서기 1712년 최덕중의 ‘연행록 일기’를 통해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과 고구려 당나라 전쟁시의 평양이 현재의 요양이었음을 밝혔다. 최부의 표해록은 당시 요동성, 요양에 살던 고구려의 후손들과 현지 요동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져 있다. 특히 고당전쟁시의 도읍지, 즉 평양이 요양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고구려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풍속을 이어가고 있었고 고구려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인하대학교 고조선 연구소에서 주최한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11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고구려의 평양과 강역을 연구한 성과물을 내놓은 자리였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현재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령성의 요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인하대학교 박시현 교수는 고당전쟁시 신라의 김유신이 평양의 소정방에게 보급을 하였다는 기록을 재검토함으로써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 아닐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서기66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현재의 우리나라 임진강선에 놓고 해석을 하면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시기나 지형을 놓고 볼 때 너무 무모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발제에서는 경희대학과 경북대학에서 윤순옥, 김효선, 황상일, 지아지엔칭 교수가 참여하였다. 네 명의 교수 모두 지리학이 전공이었다. 윤순옥 교수가 대표로 발표하였다.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요녕성의 요하유역과 이 지역의 요택의 지형변화추이를 검토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왕검성과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확정하려고 하였다. 요하의 지리적 환경은 명나라 때 까지 사람이 왕래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었음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을 받는 강단주류사학이, 한나라의 한사군이 현재의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주장은 맞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어서 인하대학교 윤한택 교수는 고려의 서북경계를 밝힘으로써 평양의 위치를 찾고자 하였다. 윤교수는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에 ‘기자’가 책봉을 개시한 곳이 ‘요좌’라고 한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소중화 조선의 이성계 때 까지 일관되게 고려의 서북경계가 요수, 요하였음을 밝혔다. 따라서 이성계가 회군반란을 일으킨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수, 요하지역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고려의 동북경계는 어디일까, 이어 발표한 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고려사와 이조실록 그리고 소중화 조선의 여러 문집을 바탕으로 고려의 동북경계를 찾아냈다. 윤관 장군이 개척한 동북9성의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를 밝히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문헌기록을 토대로 개략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실제로 현지를 답사함으로써 위치를 확정하였다. 그 결과 북한 회령 북쪽,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였음이 드러났다. 지정학 적으로도 이 곳이 연해주, 북한 지역으로 가는 요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다 당시 고려윤관장군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선을 표시하는 ‘첩경입도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어 강원대학교 남의현 교수는 ‘동녕부’를 통해서 평양성과 압록강을 새롭게 비정해 나갔다. 국내 사료와 중국 측 문헌을 종합해 본 결과 고려 말까지 평양과 압록강은 현재의 평양과 압록강이 아니라고 했다. 평양은 요녕성 요양이며 압록강은 요하였다는 것이다. 인하대학교 복기대 교수는 소중화 조선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평양이 다르게 정해졌다고 하였다. 이전에는 요녕성 요양이 평양이 분명한데 소중화 조선이 들어서면서 명나라 사대주의 바람을 타고 평양이 현재의 북한 평양으로 굳어졌다고 하였다. 인하대학교 박사과정의 이인숙씨는 교역을 통해서 왕검성을 비정했다. 윤내현 교수와 같이 하북성 창려 일대로 보았다.

인하대학교 임찬경 교수는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 사진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 역사체계를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것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려는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체계를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중화 조선은 중국사대주의에 매몰되어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체계를 택하여 오늘날 반도식민사관을 일제가 더욱 구축하게 하고

▲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일식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강역은 중국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까지 미첬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홍진 박사는 일시기록은 과학적인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기록할 경우 거짓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다. 위 그림은 당시 일식 위치도다. 관측 지점을 아무리 늘려도 하북성, 산동성에서 관측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강역이 이 지역까지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식민사학이 이어받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발상지인 졸본이 현재 중국 하북성 일대인 의무려산 지역임을 삼국사기를 들어 밝혔다. 대무신 태왕3년, 서기20년에는 이곳에 사당을 지었으며 영류태왕 2년인 서기619년까지 고구려 태왕들이 이곳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는 기록을 제시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망할 때 까지 중국 하북성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은 중국의 사서가 왜곡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 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가 역사천문기록을 통해서 고구려의 강역과 평양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일식기록을 통해서 고구려의 평양과 강역을 밝혔다. 일식기록은 과학적인 것이라서 거짓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식분도’가 넓게 나올 수 도 있는 일식도의 성격상, 관측지가 변동이 될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의 일식기록과 비교해 보면 정확한 위치는 어렵지만 대략 적으로 어디인지는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최소한 고구려의 강역은 중국 하북성 더 나아가 산동성 일대까지 나왔다. 그것도 중국 측 기록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같은 시기 고구려 모본태왕이 중국의 산서성 태원까지 정벌한 사실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이 얼마나 실사성을 갖추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샘이다. 고구려와 당시 중국의 경계가 이 일대였기 때문에 모본태왕이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한편 양홍진 박사는 중국이 우리나라의 천문 일식기록을 베껴가서 기록한 사실도 밝혀냈다. 고구려의 초기역사기록인 서기116년부터 219년에 이르는 기록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다. 동한시대의 일식기록과 고구려 일식기록을 비교하고 동한시대의 일식기록을 통해서 서한시대의 강역을 알아냈다. 또한 동한시대의 일식기록을 통해서 동한의 강역을 알아냈다. 이들 기록에 의할 때 한나라의 강역은 하북성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한나라가 요녕성을 차지하고 심지어 북한 평양까지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현재 중국과 국내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 등이 주장하는 중국식민기관 한사군 재북한설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국내외 문헌사료와 천문학, 지리학 등 현대과학을 총 동원하여 가장 객관적인 방법으로 우리 고대사의 실체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일제식민사관과 소중화 조선이 우리역사를 왜곡, 날조한 주범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학술회의장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또한 아침10에 시작하여 저녁5시에 끝났음에도 중간에 빠져 나간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고급 점심식사를 제공하여 학술회의를 풍성하게 하였다. 학술책자도 348쪽이나 되어 학술논문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번 학술회의를 이끈 인하대학교 고조선 연구소의 복기대 교수는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고대사의 주요 강역을 밝히는데 2년여의 세월을 투자했다고 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일제식민반도사관과 소중화 조선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주류사학이 제시하는 증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를 제시해서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밝혔다. 이런 점에서 우리역사의 지평을 반도에서 대륙으로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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