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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역사적 사실 사이연산군은 정말 그랬을까? - 영화 '간신'
김수지 | 승인 2015.08.30 21:57

2015년 5월에 개봉된 영화 “간신”은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다.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그 복수를 한다는 명분 아래 폭정을 휘두르다 신하들에 의해 쫓겨난 임금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영화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는 생모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연산군을 가운데 두고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와 간신이라고 영화에서 지목한 임사홍 임숭제 부자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전개 된다. 연산군 11년 채홍사(彩虹使)로 임명된 임사홍 부자는 전국 각지에서 미녀들1만 여명을 강제로 선발하여 궁으로 데려온다. 그들을 운평(運平)이라 부르고 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각 종 방중술을 연마시킨다. 이들 중 장녹수 쪽 기녀로 설중매, 임사홍 부자쪽 기녀로 다희가 등장해서 영화 내내 연산군의 마음을 먼저 독점하기 위해 대결을 한다. 대결이란 물론 거의 제정신이 아닌 섹스 중독자로 나오는 연산군에게 성적 만족을 폭발시키는 게임을 누가 더 잘하느냐 하는 대결이다. 영화의 많은 분량이 이런 내용으로 진행되다가 반정이 일어나고 임사홍 임숭재 등 주요 등장인물이 죽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간신의 장면들

임숭재는 감독의 상상력으로 마지막 장면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는 선정적이고 현란한 화면 구성으로 볼거리는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기녀들의 검무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주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그만하면 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눈앞의 권력과 욕망에 집착하다가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쳐버린 인간들의 아둔함과 비극적인 종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주제를 다루고 싶었으면 사극이 아니라 다른 소재를 찾아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의 인물과 가상의 사건으로 사극을 만들었다면 본의 아니게 감독의 예술적 상상력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 널리 알려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 홍보 관련 자료를 보면 (영화 내용도 그렇지만),연산군이 마치 정말로 전국 각지의 처자들 1만 여명을 궁궐의 기녀로 만들기 위해 징발한 것이 사실인양 써놓고 있다.

 

운평은 기녀가 아니라 악단. 또 1만 명을 강제상납하게 했다는 것도 조작된 것.

 

본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헌법에 해당되었던 『경국대전』「예전(禮典)」에 의하면 악생은 297명이고 보충인원이 100명이며, 악공이 518명이고 10명당 1명이 보충인원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들 국가 소속의 악생들과 악공들에게 내려준 새 이름은 광희(廣熙)였다. 운평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 이었다. 운평 중 음악 실력이 뛰어나 서울로 뽑혀 올라온 이들이 흥청(興淸)이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흥청악은 300명, 운평악은 700명이었다. 이들을 흥청악, 운평악, 광희악이라고 불렀는데 오늘 날로 치면 ‘국립ㅇㅇ합창단’ 이나 ‘국립ㅇㅇ무용단’이라고 보면 된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연산군 재위 12년 3월 연산군은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한다. 아마도 이 기록 때문에 흥청이 1만 명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의 내용을 더 살펴보면 이 기록은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있기 전인 11개월 전의 기록을 보자.

연산군 재위 11년 4월에 연산군은 장악원에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장악원 관리가 “정원 300명 중에서 93명을 채웠고 207명을 못 채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때 겨우 93명을 채웠던 흥청이 불과 11개월 만에 1천명도 아니고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말인데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우리는 역사 기록물을 볼 때 그 기록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과연 당시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쓴 것인지 고려하면서 자료들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정치사와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승리한 쪽에서 기록하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살펴봐야한다.『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을 몰아냈던 정치세력이 작성한 기록이다. 연산군을 몰아낸 사대부 사림 정치세력은 연산군을 절대악으로 만들어야 자신들의 반정 명분이 더 확고하게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행동들을 일일이 악의적으로 침소봉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2월에 흥청악 공연 때 “비록 제조(提調)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아야 한다”고 명한다. 예술가로 대접해 우대한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재위11년 1월에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벼슬아치들 집으로 여악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만든다. 이들 흥청악, 운평악, 광희악은 사실 사대부들이 첩을 들이는 통로로 쓰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각종 잔치 때에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여악(女樂)을 금하고 남악(男樂)만 내려주었다. 그러자 같은 해 10월28일 정1품 영사 (領事)성준이 항의했다. 우리나라는 원래 여악을 좋아했지 남악은 좋아하지 않았다 여악을 내려주시지 않으니 술을 마셔도 취하지가 않는다 그러니 조종(朝宗)의 고사를 따라 달라고. 이에 연산군은 “대개 조관들이 여기를 담연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이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앞으로는 여악을 내려주겠다고 한다.

이때 성준은 “성상께서는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신들에게만 사용하게 하시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성준의 이 말에 의하면 연산군은 흥청등 여악을 쓰지 않았고 사대부 집권층들은 흥청 같은 여악을 데려다 썼다는 말이 된다. 음악인이었던 흥청에 대해 색욕을 참지 못했던 쪽은 사실 연산군이 아니라 오히려 사대부 사림 쪽이 더 컸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산군이 색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바빴던『연산군일기』는 이렇게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연산군에게 미치광이 색마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사관이 종횡무진 눈에 띄게 애를 쓴 기록도 있다.『연산군일기』 9년 2월 8일 기사를 보면 “백마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내수사로 보내라”는 전교가 있었다면서 “백마 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라고 사관 개인의 의견을 덧붙여 놓았다. 양기를 보양을 하는데 젊은 말이 아니라 늙은 말을 쓰다니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논평을 하면서 사관은 연산군을 색광으로 만드는데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연산군이 조선의 다른 왕들 보다 더 호색한이었다는 근거는 미흡하다. 연산군의 부왕이었던 성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6남 21녀를 두었다. 그런데 1천명의 후궁을 둔 것처럼 알려진 연산군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고 후궁에게서는 서자 2명, 장녹수와 정금(鄭今)에게서 각 각 서녀 1명씩을 두었을 뿐이다. 성종과 비교해 봐도 연산군이 알려진 것처럼 미치광이 색마였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또 연산군이 얼마나 부도덕했는지 백모(伯母)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고 사관은 실록에 쓰고 있다. 연산군 12년 7월 박씨가 사망하자 사관은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썼다. 이 기사도 따져보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시 박씨의 나이가 쉬흔이 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 나이 여성이 임신하기란 그 시대에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분명 당시에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학문적으로도 왕으로써 갖추어야 할 소양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산군이 정치를 못했다는 것은 당시 정치세력이자 지배층이었던 훈구파 와 사림파 양쪽 어느 쪽도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양쪽 모두로부터 배척 받았다는 뜻이다. 왕일지라도 정치란 고립되어서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반드시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강화하고 넓히는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할 정치의 기본이다. 연산군은 그 기본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권 안의 지배 세력과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실패했다는 것 외에, 일반 백성에게 다른 왕들에 비해 특별히 폭정을 휘두른 증거는 딱히 없다. 연산군을 내쫒은 당시 사림 정치세력은 연산군이 부도덕한 색마에다가 증오할 만한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것처럼 실록에 썼지만 국가 정책으로 연산군이 일반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채홍사가 전국 각지를 누비며 기녀로 쓸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강제로 끌고 가는 일로 일반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것도 앞에서 말했듯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연산군이 민가를 강제로 철거했다는 사실들을 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관 개인의 의견을 적어 놓은 부분을 배제하고, 전체 흐름을 살펴보면 철거의 전 과정에 보상과 이주 대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철거 대상이었던 집들은 대부분 대궐 담장 아래 백 척 이내, 그러니까 30미터 이내에 있던 주택들로 권력자들이거나 권력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지은 집들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히려 왜 사관이 연산군을 그토록 증오하고 혐오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연산군은 재위 6년 8월11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예문관(藝文館)에 내린다.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깊이 슬퍼하고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한다. 때로 진실한 충성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매일 가짜 충성을 막으려고 생각한다.(深病民有飢色, 痛恨凌上風俗。 時思欲見其實忠, 日念使杜其詐誠)”

이 글을 보면 연산군은 여러 가지로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또는 느끼고 싶어 하는 왕이었던 것 같다.

 

역사적 사실과 예술 창작품과의 관계

 

과거에 실존했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드라마적 요소와 상상력을 덧붙여 대중들이 지식과 재미 그리고 교훈 모두를 얻고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해석은 항상 정치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역사가 단지 과거에 있었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바로 그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당파성이 항상 현재와 연결되어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성이란 역사적 사실을 누구의 관점에서 해석하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단지 그런 일이 그때 일어났다는 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있었던 일에 의미를 부여해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 즉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하느냐가 사실 역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현재에 새롭게 해석할 때는 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화두가 오늘 현재의 필요 때문에 과하게 조작되거나 왜곡되는 면은 없는지 항상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 “간신”은 이런 면으로 본다면 연산군과 당대를 과하고 기괴하게 포장해서 대놓고 상업적 흥행을 노린 영화다. 심하게 말하자면 사극을 빙자한 아류 포르노라고 말할 수도 있는 영화다.

영화나 드라마는 대중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엄청나게 크다. 이런 매체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 번 고정된 이미지는 그 후에 어떤 반전이 나와도 뒤집어 지기 힘들다. 연산군의 경우 당대 반정 세력들이 심하게 과대포장을 했던 이미지가 천년만년이 지나도 그 억울한 면이 앞으로도 밝혀지기는 힘들듯 하다. 죽은 자, 패배했기 때문에 어떤 변명의 기록도 남길 수 없었던 자들은 항변의 기회가 가지지 못한다. 이런 불공평함 때문에 역사를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패자 쪽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분야에서는 이런 새로운 역사적 해석에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기존 승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요소들만 부각시키고 있다. 예술적 창작 분야라고 해도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는 그 사실들의 다면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역사적으로 억울한 부분을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역사적 사실과 예술 창작품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지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하는 영화가 “간신”이었다.

김수지( <대비, 왕위의 여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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