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재패하고 해양으로, 초원으로 뻗어나간 제국들의 비밀...

기사수정: 서기2016.6.23. 16:54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대진국...

열국시대(列國時代) 화폐

우리 역사에서 열국시대는 고조선(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그 강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여러 나라가 있었던 시기다. 열국 중에서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최씨 낙랑국, 한, 신라, 백제, 가야 등이 큰 나라였고, 이외 작은 나라들도 많이 있었다. 고조선이 언제 소멸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위만조선이 한나라 무제에게 망한 서기전 108년이 고조선이 망한 시기라고 하지만 위만조선은 고조선 서부지역 일부만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서기전 232년까지 고조선이 존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고구려, 백제의 건국 시기는 서기전 57년, 37년, 18년이다. 열국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 세 나라에 통합되었다. 이 세 나라만이 병존했던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망한 서기 561년부터 백제가 망한 서기 661년까지 100년에 불과하다. 이래서 고조선 붕괴 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서기 668년까지 대략 800여년을 열국시대로 보는 것이 시대를 구분하는 바른 관점일 것이다.

열국시대에 화폐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종류와 단위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조선 후기 한치윤(서기 1765∼1814)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5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 편에는 ‘동옥저와 신라는 금과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문양이 없어 구분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위 무문전(無紋錢)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기록이 없다. 한치윤이 기록한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실물도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상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열국시대에 금‧은 화폐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있다. 신라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을 숭상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황룡사에서 불상을 만들 때 사용된 금이 1만136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고구려 사람들은 공공 모임에 갈 때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조에 의하면 선비족을 정벌한 장군 부분노(扶芬奴)에게 황금 3천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했다. 열국시대에 금‧은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기록들이므로 금‧은화폐가 주조되었을 개연성은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三國志)』는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며, 한‧예‧왜인들이 와서 철을 사가며, 시장에서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철이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철기시대는 서기전 8세기까지 올라가는 기록이 있고 열국시대는 초기부터 발달된 철기시대였다. 신라 가야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철 중에서 거래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철은 덩이쇠인 철정(鐵鋌)이다. 철정은 쇳덩어리를 압연한 오늘날의 슬라브(slab)다. 바로 농기구나 무기로 가공할 수 있는 소재다. 고대에 철정은 국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따라서 철정은 국가 간 거래나 대규모 거래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역별로 차이는 있으나 출토된 철정은 규격이 일정하다. 거래가 편리하도록 규격을 일정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규격을 통일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가 발전된 단계에 진입해야 화폐가 필요해진다. 우리와 중국 역사서에 의하면 열국시대는 농업, 목축, 수공업, 상업 등이 발전된 시대였다. 오곡과 채소 과일을 중국과 다름없이 재배했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했고, 농사에 소를 활용했고, 수리시설도 조성했다. 부여의 5부족 이름은 가축 이름을 따서 지었고, 열국시대 큰 나라였던 고구려, 부여. 신라, 백제 등은 군대의 주력이 기병이었으며, 작은 말인 과하마가 중국과의 교역 대상이었던 점에 비추어 목축이 성했던 것도 확실하다. 열국의 모든 나라에서 수공업도 활발했다.

임금이 삼베, 무명베, 명주 등 길쌈을 장려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여러 번 나타난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동부여 사람들은 외국에 나갈 때 비단 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여우, 살쾡이, 원숭이, 담비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금, 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가죽산업도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는 무기도 상시적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신라에는 마전(麻典), 칠전(漆典), 금전(錦典), 피전(皮典), 흑개감(黑鎧監) 등의 관청이 있었는데 옷감, 칠기, 비단, 가죽, 갑옷 등의 생산을 각각 담당하는 관청이다. 오늘날의 산업부와 같은 경제부처가 있었을 정도로 수공업이 발달했다. 열국시대 청동주조 기술과 금‧은 세공 기술이 당대 세계 최고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술과 산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상거래를 발전시키게 된다. 신라는 서기 490년(소지왕 12년)에 서라벌에 시장을 개설하고 사방의 생산품을 거래했다. 국가가 상업을 관리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것이다. 이어 서기 509년(지증왕 10년)에는 별도로 동쪽에 동시(東市)를 열었다. 서기 695(효소왕 4년)에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추가로 개설했다. 이와 같은 산업 발달에 비추어 당연히 화폐에 대한 수요가 있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철정이 화폐로 사용되었음은 확실하지만 개인 간 일상적인 거래에서 사용된 화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열국시대에는 국제간 교역도 활발했다. 백제 선박들이 서기 372년부터 621년까지 8차례 중국으로 항해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고, 백제가 중국에도 영토를 보유한 해상왕국이었다는 중국 기록도 엄연하다. 왜국이 한에서 철을 수입한 기록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서기 347∼375)이 일본에 철정 40개를 주었다는 기록도 왜와 백제가 활발하게 교류한 증거의 하나다. 부여도 서기 120년에는 태자가, 130년에는 왕이 후한을 방문하고 교류했다. 고구려는 특히 장수왕(재위, 서기 413∼491)때에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손권의 오나라에 담비가죽 1천장을 보냈고, 북조의 후조는 곡식 30만곡을 고구려로 싣고 왔고, 고구려는 남조 양나라에 말 8백 필을 수출했다. 이 교류는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고구려의 해양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다. 열국과 중국의 교역은 물물교환이었거나, 금‧은으로 거래했거나, 당시 중국 화폐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각지에서 출토된 중국 화폐인 반량전(半兩錢),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이 그 증거일 것이다. 특히 오수전은 서한 때부터 7세기까지 사용된 철전이다.

열국시대 화폐가 없었다면 화폐단위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록에 분명하게 이 시대에 화폐단위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서기 529년 백제 무령왕비가 돌아가셨는데 전1만문(錢一萬文)으로 장지를 매입했다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을 역주한 사람은 ‘돈1만매’라고 해석해 놓았으나 문(文)은 필자가 보기에는 확실히 화폐단위이다. 왜냐하면 문(文)은 중국 갑골문부터 송대에도 사용한 화폐단위이고, 조선 후기 주화의 중량을 표시할 때 1돈을 1문으로 표시했기 때문이다. 개성상인이 남긴 복식부기 장부에서는 문(文)이 오늘날 금액을 표시하는 ₩나 $와 같았다. 그러나 무령왕릉 지석의 1만문이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와 동옥저에서는 남자가 장가갈 때에 신부 집에 돈을 지불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곡식이나 베로 지불했다면 구태여 돈을 의미하는 전(錢)으로 표기하지 않고 벼(租)나 포(布)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도 열국시대 화폐가 있었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곡물과 포목이 열국시대 화폐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곡물은 휴대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열국시대에 물물교환의 대상이었겠지만 화폐로 사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베는 화폐로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편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 ‘서라벌의 시장물가는 베 1필에 벼 30석 또는 50석인데 태평성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경우 베는 무명베일 것인데 규격화 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치척도로, 교환의 수단으로, 저장의 수단으로, 베는 화폐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한은소식 2016년 5월호에서 전재').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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