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관의 또 다른 되풀이....

최종기사수정: 2016.6.2. 16:41

일제가 다 찾지 못한 새로운 자료를 근거로,

일제식민사관을 완성해가는 노중국씨...

여름을 향해서 달리는 6월 1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제11회 시민강좌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렸다. 이번 강좌는 계명대학교 사학과 전 교수, 노중국씨가 맡았다. 노씨는 ‘삼국은 언제 건국되었을까?’를 가지고 강의에 나섰다. 노씨는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라는 주제를 내세워 삼국의 초기를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이전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일본제국주의가 부정한 사례를 언급했다.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어 이에 대한 반격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빙론’이 대두되었음을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노씨 자신은 일제가 그런 것처럼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과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개국 년대와 그 내용들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 중국 삼국지 동이전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노씨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다시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중국 사료와 다른 사료 등을 바탕으로 삼국의 초기 역사를 다시 썼다. 이를 위하여 먼저 삼국사기 기록을 분해하는 분해론과,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을 가지고는 단계화론을 주장하였다. 분해론은 초기기록을 다시 해체하고 다른 기준으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주된 분해대상은 정복전쟁관련내용이다. 노씨가 보기에 ‘삼국이 아직 제대로 국가체제도 못 갖추고 있을 시기에’ 강력한 왕국에서나 가능한 정복전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 개국시기인 온조왕기에 정복기사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없으니 후대에 한 것으로 보겠다고 했다. 온조왕 대에 정복기사가 많이 나오는 것은 개국시조의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후대에 조작해서 넣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조왕대의 정복전쟁을 서기234년 이후인 고이왕이 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서기 9년경에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기록도 서기346년 이후인 근초고왕이 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노씨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의 성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해씨와 고씨로 나누고 백제는 해씨와 부여씨로 해체하였다. 신라의 경우는 박->석->김으로 보면서도 강력한 왕국의 왕으로 보지 않았다. 연맹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삼국의 초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이 왕이 아닌 연맹체의 수장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의 관등제 제정시기도 삼국사기 기록을 믿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경우 고이왕 때인 서기260년, 신라의 경우 유리왕 서기32년에 관등제가 완성되는데 이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포항 등지에서 발굴된 각종 신라비에는 관등제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는데 이 비석이 5세기 후반 것 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 전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노중국씨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입각하여 삼국의 초기 역사를 중화사관에 맞게 새로 쓰는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삼국의 개국 시기의 상한선을 제시했다. 노씨는 삼국이 성립하기 전에 한땅(한반도)과 만주에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했다고 보고 이 소국들의 개국시기의 상한선을 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삼국의 개국 시기를 잡겠다고 하였다. 소국들의 개국시기의 상한선은 우리나라 북부를 위만조선이 차지했다고 보는 반도식민사관을 기준으로 삼았다. 결국 소국들이 성립한 시기는 서기전 194년 이후 라고 했다. 그 결과 고구려의 경우 개국시기에 대한 사료기록이 9백년, 8백년, 7백년의 세가지가 있는데 그 중,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 택하여 7백년이라고 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668년을 기준으로 7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개국시기를 정하겠다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는 서기전 1세기로 잡았다. 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나중에 검토해야 할 과제라고 하였다.

노씨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과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첫째, 노씨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양만 살짝 바꾼 철저한 일제식민사관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서기 4세기경부터 일본이 우리나라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만들기 위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해 버렸다. 그런데 노씨의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기준으로 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일제가 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둘째, 노씨는 우리사서가 아닌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을 기준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 맞지 않으니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역사는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맞지 않는다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의 초기 역사를 부정해 버렸다. 그런데 노씨는 중국인의 입장이 되어 중국 사료에 맞지 않으니 삼국의 초기 역사가 가짜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관, 지금으로 말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셋째, 노씨는 삼국의 초기 역사를 부정하기 위하여 일제가 그랬듯이 북한 평양지역을 위만조선이라고 하고 이어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치소로 보았다. 또한 이미 날조된 것으로 판명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를 근거로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낙랑군 소속 25개현을 모두 나라로 바꾸는 폭거를 저질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노씨는 삼국사기에 당시 한강 이남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나오나, 한강이북에는 거의 나라가 나오지 않음을 문제 삼아 북부에도 남부와 같이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재평양설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 속현들을 모두 북부에 존재한 소국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역사를 창작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난에 가까운 지적이 잇따랐다.

넷째, 노씨는 백제의 초기역사를 부정하기 위하여 백제초기기록에 나오는 ‘패하’의 지명이 오늘날 북한 예성강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형상, ‘강’이나 ‘수’는 있을 수 있으나 ‘하’라는 대규모의 물줄기를 나타내는 지명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는 대륙에서나 어울리는 지명임에도 식민사관을 고수하려다 보니 기본적 역사상식을 벗어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고대사시민강좌에 참여하고 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나오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번 강좌에서도 질문을 받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불리한 것은 답변하지 않았다. 노 씨는 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삼국사기는 1차 사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가 중국사서나 국내 사서를 인용하는 기사는 1차 사료가 아닐 수 있으나,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기사는 1차 사료일 수밖에 없는데 모두 싸잡아 1차 사료가 아니라고 하는 대담성에 놀랍다는 반응들이 잇따랐다. 이번 강좌에는 학생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물어 보니 교수들이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삼국사기 불신론에 입각한 삼국건국시기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지난번 강의에 대한 비평문을 방청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반응들이 지난번 못지않았다. 어떤 방청객은 ‘지난번에 못 나왔는데 지난번 것 있느냐’고 물었고,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다음에 꼭 갖다 달라’고 했다. 또 어떤 방청객은 지난번처럼 “거, 필력이 대단하다. 도대체 누가 쓰는 거요? ” 라고 하며 작성자를 알고 싶어 했다. 어떤 분은 ‘이것(비평문)이 더 재미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6월 8일 조법종 우석대 교수가 ‘동북공정과 장백산 문화론’으로 강좌를 맡는다. 6월 8일 강좌를 마지막으로 전반기 시민강좌는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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