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원산경계의 고려강역은 일제식민사관...

기사최종수정: 서기2016.05.30. 13:25

 

<고려도경>은 대륙고려를 말한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금(金)나라에 이른다.”

고려의 강역을 기술한 이 대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봉경(封境)편에 기술된 내용이다.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불리는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 인종 1년(1123년)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에 돌아가 고려의 인문과 지리 등을 담아 저술한 40권으로 된 책이다. 자(字)가 명숙(明叔)이며 호(號)가 자신거사(自信居士)인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이나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의 강역을 고찰하기 위하여 위의 권3 봉경(封境)편을 이어서 보자.

“고려는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개의 어금니처럼 들쭉날쭉하게 얽혀있다.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나라를 곧게 지키지 못하여 고려에 병합이 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서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그 강역은 무릇 3,790리이다. 해도(海道)로 가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다. 오늘날 건국된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옛적의 봉경(封境)은 동서는 2,000여 리, 남북은 1,500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기존의 역사인식으로는 한반도를 벗어나서 고려의 강역을 생각할 수 없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한 고려의 강역이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직접 체험을 하고 저술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의 역사를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압록강과 원산만 이남의 어디에 동서가 2천리 넘는 곳이 있는가? 한 예로 현재의 휴전선은 155마일이다. 사실 155마일도 직선거리도 아니지만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0Km 정도이며 우리 고유의 리(里)로 환산하면 고작 600여 리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의 <고려도경>에서 이야기하는 고려의 옛 강역 동서 2,000여 리와 남북 1,500여 리는 어디에 조재하여야 하며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리가 되었다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또한 고려의 동쪽은 백두대간과 그 너머가 바다인데 어디에 금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보물 제1537호, 소재지 국립중앙도서관, 제작시기 조선 시대(서기1471년), 붉은 화살표 위치가 고려시대 윤관장군이 북방여진족을 축출하고 비석을 세운 공험진이다. 두만강 넘어 700백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국사책에서 배우고 있는 신의주-원산만 선 이남의 고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고려의 강역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적혀 있는 고려의 강역을 추론해보자.

먼저 고려는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 지역이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이 네 곳은 현 중국의 산동성 발해 연안을 따라 북쪽과 서북쪽에 늘어선 지명들이다. 이곳에서 마주보고 있는 곳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요녕성이다. 그렇다면 하북성과 요녕성 중의 하나가 고려의 강역이 시작되는 곳인데 어디일까? 당연히 하북성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의 위치와 갈석산에 대한 <통전>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거란지리도>에 그려진 요수는 현 요녕성이 아닌 하북성에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거란지리도>에 표시된 요수는 현 하북성 천진을 거쳐 발해로 흘러들어가는 영정하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압록강의 서쪽의 백랑・황암 두 강이 합류된 요수는 영정하였으며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요사(遼史) 권115 고려 편에서 “요 성종 3년(985년) 가을 7월 모든 도(道)에 명을 내려 각각 병장기를 갖추도록 하고 동쪽으로 고려를 쳤다. 8월 요택(遼澤)이 물에 잠기어 출병을 그만두었다”라고 하여 요수가 거란과 고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요수는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대개 예전에는 동북의 모든 물을 일컬어서 압록이라고 칭하였다.”하고 하여 압록이란 말은 고정된 강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이란 지명은 지난 2008년 10월 칼럼에서 수계의식을 갖던 특별한 강을 지칭하였으며 나라가 옮겨질 때마다 이동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갈석산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데 당나라 때 두우(杜佑, 735 ~ 812)가 편찬한 <통전(通典)> 권186 변방 고구려 편에서 “갈석산은 한(漢) 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려에 들어가는데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물론 고구려이다. 그런데 위 기록의 주(注)에서 “갈석산은 오늘날 하북성 북평군 남쪽 20 리에 있으며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左碣石)이라 한다.”라고 하여 갈석산은 하나가 아니며 여러 곳에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갈석(碣石)이란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이 몽념을 시켜 현 하북성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산해관까지 장성이 연결된 것은 근대의 명나라 때이다. 갈석산을 현재의 산해관 근처에서 찾거나 심지어는 황해도 수안을 한 낙랑군 수성현이라 하여 갈석산이라 우기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며 역사와 영토를 중국에게 통째로 내주는 꼴이다.

▲ 거란지리도 중의 발해인근 지도 -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등주, 래주, 빈주, 체주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통전>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갈석은 현 산서성 상산(常山) 즉 항산(恒山) 주변에 있었던 갈석이었으며 고려경내에 있었던 것은 하북성 갈석으로 보아야 한다. 산서성 지역의 갈석산은 <상서(尙書)>와 <사기(史記)>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하(夾右碣石入于河)” 즉 “갈석을 오른쪽(서쪽)으로 끼고 황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한 갈석으로서 고구려와의 경계인 갈석이며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후대에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았을 때 <고려도경>의 고려 강역에 대한 기술은 올바른 것이며 하북성에서 두만강 너머까지가 고려의 강역이었다. 결국 <고려도경>에서 말한 요수에서 3,790 리의 출발점이 하북성이 되어야만 서두에 말한 강역과 합치되게 된다. 또한 현재 한반도 남해를 요해(遼海)라고 부른 적이 없고 요(遼)지역에 있던 바다를 요해라 한 것으로 현 발해가 요해였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고려의 강역과,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있다는 <고려도경>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현 요녕성의 요하가 고려시대에 압록강이었다면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서희 장군이 거란의 침략에 맞서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 지역과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지역이 현 압록강 이남 평안도 일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지명의 비정이다. 이는 압록강의 개념과 이동을 고려하지 않은 고착화된 개념에 기인된 것이며 마땅히 현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서경이었던 평양이 <원사>에서는 동녕부라 하고 현재의 요동 지역이라 하였으며 원나라에서 고려 말기의 임금들을 심양왕이라 한 것 역시 고려의 강역과 무관하지 않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려의 장성과 압록강 이남에 표시된 강동 6주와 함경도 지역으로 비정한 여진의 위치도. 강동 6주와 동북 9성의 위치는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윤관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곳도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으로 비정을 하고 있다. 윤관의 동북 9성은 함경도 지역이 아니라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있는 선춘령(先春嶺) 일대였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이다. 그 비에 새긴 글은 비록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고려사지리지에 두만강 건너 7백 리 선춘령 밑에 윤관이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라고 하여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되는 지역임을 말하고 함흥평야 일대로 비정한 역사의 강역을 깎아내린 역사학자들을 질타하였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편찬하면서 고려의 전반적인 부분을 서술하고 그림과 지도를 남겼지만 그림과 지도가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아쉽다. 남송이 전란에 휩싸인 기간에 <고려도경>의 그림은 분실되었다고 하는데 강역을 고찰함에 있어서도 지도가 남아 있었다면 많은 부분이 쉽게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의 역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 일부러 그림을 없앴으며 또한 글로 서술된 부분도 첨삭을 가하여 왜곡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서긍이 남겨 놓은 책에서 이렇게나마 고려의 역사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가 결코 나약하고 작은 나라가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려의 강역은 현 중국 하북성에서 두만강 이북까지 이어진 나라였으며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손색이 없는 나라로 475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현 국사 교과서의 고려부분은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글: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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