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을 평양이라는 매국식민사학계...

광복된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일제가 심어놓고 간 일제식민사관은 청산되지 않고 그대로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라지기는 커녕 다양하게 변형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다고 전 생민들 상대로 퍼뜨리고 있는 매국식민사학계는 대륙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1차사료와 유물 그리고 기타 실증적 자료에는 눈을 감고, 일제가 날조, 조작한 유물을 근거로 낙랑군 재평양설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중화패권주의사관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의 영토와 직결되는 문제다. 매국식민사학의 이러한 매국행위에 대하여 민족사학계가 이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며 총성없는 전쟁을 매국식민사학계를 향하여 벌이고 있다. 이 번 기사는 총 3부로 나누어 진행한다. '식민사관의 감추어진 맨얼굴', 그리고 최근에 내 놓은 '임나일본부는없었다'의 저자 황순종 역사연구가를 통해서 한사군과 임나일본부가 허구임을 밝힌다(편집부).

 

우리 고대사를 모두 강탈해간 중국의 동북공정을 추종하는 매국식민사학계...

한사군과 임나일본부 비판

I. 식민사학의 두 관점

고대사학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 고대사를 말살·왜곡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광복 후 70년이 되도록 반민족적·매국적 역사학을 퍼뜨리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식민사학의 대표적 관점인 이른바 한사군과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비판코자 한다. 한사군(漢四郡)은 위만조선(서기 전 194~서기 전 108)을 한(漢)나라 무제가 멸하고 북한 지역에 4군을 두어 지배했다는 설이며, 임나 일본부설은 서기 4~6세기에 일본이 남한 지역의 가야를 정벌하고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민족과 역사가 외세의 지배를 겪은 열등한 것으로 자율적 역사가 아닌 타율적 역사라는 타율성론을 주입시키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외세의 지배로 인해 외국의 선진 문물이 들어옴으로써 정체되어 있던 우리 사회가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을 주입시켜 식민지배의 타당성과 혜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사군과 임나를 한반도로 설정하여 대륙에서의 우리 역사를 지우려는 반도사관을 정설화하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고대사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학계의 매국사학에 대해 그 허구성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로 하겠다.

II. 한사군 비판

1. 용어의 부당성

이른바 한사군은 위만조선의 땅이 한나라의 네 군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식민지배를 강조하는 이 용어는 극히 부당할 뿐아니라 그 내용도 맞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을 평정하여 4군이 되었다고만 했으나 군들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의 『한서(漢書)』에는 무제가 낙랑·현도·진번·임둔의 4군을 두었다고 하면서도 그 「지리지」에는 낙랑·현도의 2군만 기록하고 진번·임둔은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진번·임둔은 둔 지 26년만에 다시 우리가 빼앗았기 때문이다. 한편 낙랑·현도는 기록상 수백 년 존속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저항에 부딪쳐 일찍이 원 위치에서 중국으로 쫓겨나 명목만 유지했다. 또 현도는 처음부터 3개 현에 불과한 작은 군이었으며 낙랑은 당초 25개 현이 있었으나 3세기에는 진(晉)나라에 6개 현만 잔존하여 쫓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나라의 동북 군현에 대해 송호정(한국교원대 교수)은 이렇게 말한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 지배하려 했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차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했다.’고 씌어 있다. ···· 한사군이 구체적으로 설치된 사실조차 없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모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사군에 대한 서술 분량도 1974년 이래 점차 줄어갔다. 급기야 1990년판 이래 제 7차 교과서에는 4군의 명칭마저 사라졌다. 이처럼 교과서에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에 설치된 한사군과 그 가운데 대동강 유역에 중심을 둔 낙랑군에 대해 그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서술되어 있다. 교과서 서술은 한 군현의 설치와 식민지배라는 측면보다는 한민족의 반발과 축출 움직임 쪽에 초점을 두고 있다. ···· 400년 이상 한반도 서북지방에 존재한 낙랑군의 존재를 교과서에서 빼거나 지도에 표기하지 않는 것은 고대의 식민 경험을 현대의 식민지 경험과 동일시하여 그 사실을 은폐하려는 식의 발상이다. 이것이야말로 또 다른 열등의식의 표출이 아닐까?”(『단군,만들어진 신화』, 184~186)

송호정은 교과서에 ‘한사군’이 빠졌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또 낙랑군이 400년 이상 한반도 서북부를 지배했다고 단정짓는다. 낙랑군이 400년 지배한 것만 강조할 뿐, 우리 민족의 저항에 부딪쳐 25현이 6현만 남아 후퇴한 사실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느 민족이 외세의 지배를 찬양할 것이며 어느 나라의 역사학자가 외세를 축출하려는 민족적 노력을 폄하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송호정같은 매국적 사학자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 5월 20일,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 황순종 역사연구가 출판 기념으로 카톨릭청소년 회관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 강연회에는 특히 젊은 청소년들이 많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2. 한나라의 선진 문화?

한사군의 지배를 중요시하는 매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한나라의 선진 문화와 문물이 이 땅에 유입됨으로써 미개한 우리 민족이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논리를 편다. 그리하여 매국사학을 이 땅에 심은 이병도는 서기 3세기 이전의 우리 역사를 ‘한 군현 설치’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앞 시기인 2천 년 고조선 역사를 말살했다. 그리고 그 한사군의 선진 문물의 혜택을 이렇게 예찬한다.

 

“한(漢)의 물질문명 내지 정신문명은 자연 물흐르듯 들어와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 그래서 낙랑의 수부(首府)는 마치 한의 알렉산드리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시 도시의 번영과 시민생활의 화사함과 미술·공예의 진보가 어떠했는가는 근래 발견된 그 시대의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한문화 특히 철기문화의 영향은 군현 외의 주변사회에도 미친 바 많았으니 남한지방은 물론 멀리 왜인 사회도 한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한국사대관』, 68~69)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군현들 특히 낙랑군의 중심지라는 평양은 알렉산드리아로 비유되고, ‘도시의 번영과 생활의 화사함이 있는 낙원으로 그려진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가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평양은 곧 보겠지만 옛 낙랑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병도의 주장은 잘못이다. 또 한나라의 문물이 우리보다 매우 앞섰다는 것도 아무런 근거를 대지 않은 채 당연한 일로 주장했으나 이것도 허위에 불과하다. 이병도가 고조선의 문물에 대해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은 데 비해, 윤내현(단국대 명예교수)은 『고조선연구』라는 기념비적 대작을 통해 고조선의 문화·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고 청동기시대도 중국보다 수백 년 빨랐다고 말했다.

3. 낙랑군의 위치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문제는 우리 고대사의 무대를 알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지명이다. 학계에서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맹종하여 낙랑=평양설을 고수해 오고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허구임을 밝히겠다. 우선 낙랑군이 되었다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보면 『사기』「조선열전」에 그 도읍지를 ‘왕험성’이라 했는데, 이는 단군왕검의 ‘왕검성’을 중국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며 그곳이 고조선 도읍지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의 주석서를 보면 이 왕험성의 위치가 요동군의 험독현 또는 창려군의 험독현이라고 하며, 또 패수의 동쪽이라고 했다. 요동이나 창려는 지금의 랴오닝(요령遼寧)성이므로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그곳이 패수의 동쪽이라 했으므로 낙랑군의 패수 또한 그 서쪽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열전」에 원래 위만이 조선으로 올 때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왔다고 했으므로 그가 도읍한 왕험성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주석은 옳은 것이다.

이와 같이 위만조선이나 패수·낙랑군은 대륙의 지명인데도 매국사학에서는 북한 지역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주장대로라면 위만이 패수라는 압록강이나 청천강을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와야 낙랑이나 왕험성이라는 평양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사기』는 물론 그 주석자들의 견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은데, 매국사학에서는 이런 근거를 무시한 채 정설로 고수하고 있다.

다른 예를 보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칠 때 해군대장 양복은 ‘제(齊)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從齊浮渤海)’ 열구에 상륙했다(「조선열전」). 이에 대해 이병도는 1937년 「패수고」에서 ‘발해(황해)’라고 쓰고 한나라 해군이 바다 건너 대동강 하구인 열구에 상륙한 것으로 조작했다. ‘발해’에 떠서 발해만 서안에 상륙한 것을 이렇게 임의로 ‘황해’라고 하니 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문헌고증의 방법이라는 것이 허울 뿐인 거짓임을 알게 된다.

다른 예를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에서 보자. 온조대왕이 백제를 건국할 때 패수·대수의 두 강을 건너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이 강들은 낙랑군을 흐르는 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병도는 온조대왕이 고구려의 졸본(압록강 북쪽)에서 ‘황·평 양도의 길’을 거쳐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고 썼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왔다는 것은 자신이 옛 낙랑군이라는 곳을 관통해 왔다는 것인데, 당시 침략지인 낙랑군에서 온조 일행을 통과시켜 주었을 리가 만무하므로 낙랑군을 지나왔다고 쓰지 못하고 근세조선에서 둔 황해도·평안도 운운한 것이다.

이처럼 이병도 이후의 매국사학은 허위와 왜곡으로 일관해 왔으며 신진 학자라는 자들도 예외없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금년 『역사비평』봄호에 세 신진 박사들(기경량·위가야·안정준)이 이병도나 송호정의 잘못을 비판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야의 민족사학자들에게 포문을 열고 ‘사이비’ 역사학으로 매도했다. 그들의 글을 보면 매국사학의 전통에 따라 거짓을 자신들의 무기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중 위가야는 낙랑=평양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후세의 ‘중국 주석가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니, 위에서 본 왕험성의 경우만 하더라도 세 주석가 중 아무도 한반도라고 보지 않았다. 만약 위가야의 주장처럼 주석가들이 낙랑=평양설을 말했다면 왜 그 중의 단 하나도 문헌적 근거로 내세우지 못하는가?

또 안정준은 낙랑=평양설의 근거로 평양 지역의 고분 유물을 들었다. 북한에서 발굴한 2,600여의 고분에서 나온 낙랑 목간을 비롯한 몇몇 유물·유적을 예로 들면서 낙랑군의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국사학 특유의 속임수에 불과하니 신진 학자라는 그의 장래가 매우 걱정스럽다. 그 이유도 매우 간단하다. 북한에서 발굴조사한 결과보고서는 안정준의 말처럼 낙랑=평양이 아니라 낙랑=요동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안정준은 평양 유물 조사에 참여도 않고 유물을 본 적도 없으면서 북한 학자들의 결론을 제멋대로 뒤집으니, 이런 사람이 학자라고 할 수나 있을 지 의문이다(2부에서 계속).

 

글: 황순종역사연구가, 저서 '시민사관의 감추어진 맨얼굴', '임나일본부는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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