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의 홍익은 사람은 물론 만물을 살린다는 살림의 뜻이 있다.

 

글: 조옥구(원광대 역사학, 한자와 한글 거리 교수)

 

 

민주당이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을 삭제하려다 발각돼 시끌

홍익인간은 단독해석 곤란, 성통공완 재세이화와 해석해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살리는 것을 자기 삶의 목표’

이것이 살림이고 홍익인간은 살림의 뜻이 들어있어

 

▲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 전해 온다. 오른쪽에 나무가 있는 데 이는 한웅천왕이 홍익인간하러 내려온 신단수를 상징한다(편집인 주).

(요사이 홍익인간의) 홍익(弘益)으로 세상이 시끌시끌하다.

‘그 의미가 너무 막연하므로 교육법에서 삭제하고 다른 말로 바꾸자’라는 것이 발단이다. 문제의 원인이 마치 ‘홍익(弘益)’에 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꾸며대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게 어디 ‘홍익’의 문제인가!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천박함이 문제지.

사실 이런 혼란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다.

5천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홍익(弘益)’이라는 용어를 만든 선인들의 가치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弘益 (홍익)’이라고 쓰고 외면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잘 모른다.

‘弘益’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풀이는 그래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왜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막연하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弘益’을 알려면 그 배경이 되는 ‘성통공완(性通功完)’, ‘재세이화(在世理化)’를 함께 알아야 한다.

‘弘益’이 막연하기만 한 것은 이처럼 셋을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데

그중 홍익만 떼어서 보려고 하므로

설명이 쉽지 않다.

‘弘益’의 ‘弘(넓을 홍, 클 홍)’과 ‘益(더할 익)’ 자도 지금의 풀이만으로는 매우 미흡하다.

위의 셋에서

‘성통공완(性通功完)’, ‘재세이화(在世理化)’는 ‘弘益’의 전제조건이다.

‘성통공완(性通功完)’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 하면 그 상태가 바로 ‘弘益’인 것이다.

‘성통공완(性通功完)’을 다른 말로는 ‘道를 깨친다’라고 할 수 있고 ‘재세이화(在世理化)’는 다른 말로는 ‘德을 베풀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道)’와 ‘덕(德)’을 알면 ‘홍익’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도’를 완전히 깨우쳐 궁극적 실체와 하나가 되어야만 ‘덕’이 실현되는 것이며 이 상태를 홍익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홍익 (2)

도(道)와 덕(德)까지 끌어다가 홍익을 설명해보았지만, 그 의미가 여전히 막연하다고 느껴진다면 우리의 생활 용어인 ‘살림’이나 ‘살림살이’를 생각하는 방법도 있다.

설마 한국인으로서 ‘살림’, ‘살림살이’라는 말 모르는 이가 있을까?

홍익을 어렵게(?) 느낄만한 많은 장삼이사를 배려해서 만든 용어가 ‘살림’이고 ‘살림살이’다.

우리는 자기의 삶, 살아감을 ‘살림’ 또는 ‘살림살이’라고 말한다.

‘살림’, ‘살림살이’가 무슨 말인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살리는 것을 자기 삶의 목표로 하겠다’라는 다짐이 바로 ‘살림’이고 ‘살림살이’다.

전쟁과 폭력, 이해타산이 난무하는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서 권력이나 명예나 각종의 이익 추구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겠다는 각오가 훨씬 현실적으로 보이는데, 한국인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어서 평생 수신제가도 힘겨울 듯한 사람들조차도 자기 삶의 목표를 ‘살림’이라는 거창한 말로 부르는 것일까?

더구나 누구도 회피할 수조차 없도록 아예 생활 용어로 못 박아 노상 고백하면서 살 수밖에 없도록 장치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국인의 공동체적 철학, 사고의 경향을 알지 못하고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홍익’의 개념을 정립한 이들이 누구인가?

‘홍익’이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면 ‘홍익’ 본연의 근본이념에 반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근기가 조금 부족한 사람들일지라도 ‘홍익’에 동참할 수 있는 방편으로 배려한 장치가 바로 ‘살림’이라는 말이다.

살면서 노상 ‘살림’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누구든 자기 삶을 일컫는 ‘살림’, ‘살림살이’라는 말을 알아차리고 그런 각오로 살면 그것이 바로 ‘홍익’으로 가는 길이라는 거다.

홍익이 막연하고 어렵다면 우리에겐 이처럼 명확하고도 쉬운 방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살림, 살림살이는 곰곰 씹을수록 묻어나는 묘한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살림을 알아차리는 순간 감동을 끌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다.

살리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가 정립되지 않으면 ‘홍익’의 막연함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살림’이라는 말을 만든 주인공들의 의식세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다시 ‘弘益’을 보아야 한다(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