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에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개입했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명예교수)

 

 

4.19혁명의 위력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것 아냐

미국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으로 억지로 물러나

미국대사 매카노기와 주한미군사령관, 이승만 설득

 

▲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 성명을 낸 직후 경무대를 떠나고 있다. 사진 출처: 영남신문

4.19의 역사 한 토막

1990년대 초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국무부가 비밀해제한 1960년대 미국 외교문서집을 읽다가 4월혁명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알게 됐다.

4월 19일 대학생 데모와 25일 교수 시위행진에 이어 26일 대학생대표단이 경무대 (청와대)를 찾아간 뒤 이승만이 (조건부)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승만의 하야는 매카노기 주한미국대사의 끈질긴 압박과 회유에 따른 것이었다. 1994년 발표한 내 논문 일부를 그대로 아래에 옮긴다.

10시 35분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이 경무대에 도착했다. 매카노기의 요청대로 이승만이 학생대표단과 면담을 마친 직후였다.

김정렬이 건네 준 영어로 번역된 성명의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1) “만약 전 국민이 바란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If it is the wishes of the whole people, I am glad to resign from the presidential office.)”;

(2) 3.15 선거가 불법으로 치러졌다고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선거를 재실시하라고 이미 명령했다;

(3) 선거에 개입된 모든 불법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기붕에게 모든 정치적 지위에서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4) 만약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겠다.

이에 매카노기는 각 항목에 대해 분명한 뜻을 요구했다. 특히, 첫째 항목과 관련해, 이승만이 “내가 만약 (국민) 여러분에게 방해가 된다면 물러나겠다 (if I stand in your way, I will resign)”는 의미라고 설명하자, 매카노기는 이 경우에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며 그의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전적으로 분명하지 못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승만에게 현재 “매우 위험하고 폭발적인” 정세가 “명확하고 만족스런” 결의의 표명을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위의 네 가지 조항이 국민의 요구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 (we doing all we can)”이라는 이승만의 대답에 매카노기는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지의 표명이 꼭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단호하게 지적하며 현 상황에서 “애매한 표현과 임시변통”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것 (government doing all it could)”이라며 계속 명확한 대답을 피하자, 매카노기는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미국의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미국의 우려를 드러냈다.

나아가 이승만을 “평생 동안 어떤 한국인보다 더 공경받고 존경받아온 한국 민족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추켜세우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죠지 와싱턴과 비교하기도 하며 다음과 같이 물러나라고 권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그의 책무로부터 벗어나서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국민이 믿는 때 (when people believe that elder statesman, having carried so many burdens for so many years, should step away from his responsibilities, retire to position respect, and turn burdens government, especially in these complicated and difficult times, over to younger men)”가 한국에 도래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1945-1948년의 미군정 기간에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어 “미군과 달러와 경찰”로 남한을 지배해오다, 독재정치와 휴전반대 때문에 1952-1953년 사이 적어도 두 번에 걸쳐 미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거될 위기를 넘겼지만, 1960년 4월 결국 미국의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재봉, “4월혁명과 미국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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