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업을 이행할 지도자가 나타나야 한다.

글: 송필경(범어연세치과 원장)

 

6.25 한국전쟁에 미국이 퍼부은 폭탄, 2차대전보다 많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쏟아부은 폭탄,

1,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퍼부은 것 초과

미국보다 국력이 1천 2백배 이상 적은 베트남이 이겨

호치민의 지도력과 베트남 인민의 총화단결의 결과

한국은 419혁명, 610항쟁, 초불혁명 등

여러 혁명 성공시켰으나 지도력 부재로 미완성

 

▲ 왼쪽의 호치민은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국력이 1천백 이상 높은 미국을 상대로 이겼다. 한국에서는 여러번의 혁명이 있었으나 혁명으로 집권한 세력이 부패와 무능으로 혁명이 무위로 돌아갔다(편집인 주)

나는 찾고 싶다,

“인민의 열망을 한 치도 낭비하지 않은 지도자”를!

20세기에 일어난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지구촌을 파멸할 듯이 전쟁을 했다.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곧이어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낳은 냉전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지구촌의 아주 조그만 지역인 한반도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지구촌 수십 개 나라에서 사용한 양보다 많았다. (약 3백만 톤 추정)

1960년대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베트남 전역과 베트남접경 지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일부에 미국이 퍼부은 폭탄 양은 제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모두에서 사용한 양보다 더 많았다. (약 8백 5십만 톤으로 추정)

베트남인 한 사람은 미국에게 약 260kg 폭탄을 선물로 받았다. 4인 한 가구면 1톤이었다.

당시 최대 산업국가 미국은 아시아의 남루한 농업 국가인 베트남보다 국력이 1천2백 그 이상 강했다. 그런데 베트남이 굴복하지 않았다. 침략국이 승리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패배를 뜻했다. 미국은 완패했다.

다윗 베트남이 골리앗 미국의 품에 패배를 안긴 것은 전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어찌 이런 일이 베트남에서 일어났는가?

베트남은 당시 3겹의 고난에 휩싸여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찌꺼기인 전근대적인 유산, 미국이 강요한 분단과 반공주의, 미국에 빌붙은 괴뢰 정권의 부패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처지와 다름없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베트남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간절히 원했다. 스스로 돕지 않으면 하늘도 돕지 않는다는 것을, 두들기지 않으면 문이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베트남 인민은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을 강요하는 미국과 고통스럽지만, 전쟁을 통한 민족해방혁명을 택했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두 요소가 필요하다.

한 요소는 적절한 이념을 발휘하는 혁명세력의 지도력이다.

또 한 요소는 인민의 자발적인 헌신이다.

베트남 인민들의 헌신적인 애국심은 지난 2천 년간 외세에 저항한 불굴의 역사 정신 속에 유전인자로 녹아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는 미국의 등에 타고 베트남을 다시 침략했다.

그러자 호찌민은 전 세계를 향해 이렇게 선언하고 베트남 인민을 결속했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

실제 호찌민은 프랑스와 미국이란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인민의 외세저항 애국정신을 한 치도 낭비하지 않은 지도력”을 발휘했다.

베트남처럼 혁명의 두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경우는 세계혁명사에서 희귀하다.

우리 인민은 어땠는가?

우리 인민의 역량은 베트남 인민에 비해 못지않았다.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전쟁 파괴는 베트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역과 캄보디아와 라오스 일부 지역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 영역은 한반도의 2배 넓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3년, 베트남전쟁은 8년이었다. 베트남에서 사용한 폭탄 양은 한반도에서보다 약 3배였다.

전쟁 영역과 기간을 고려하면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인류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남한 정부가 남한 인민에게 행한 학살은 몇십만 또는 백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전쟁은 그토록 포악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7년 뒤인 1960년, 남한 인민은 4·19혁명을 통해 포악한 독재자 이승만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정권을 인수한 장면 정권이 우물쭈물하자 곧바로 박정희 군사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차지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인민은 끊임없이 저항했고, 결국 1979년 부마항쟁을 통해 포악한 박정희 유신의 심장에 총알을 박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공백에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서로 위세를 부리자 광주 폭거를 통해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했다.

전두환 폭압에도 인민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87년 610항쟁으로 포악한 전두환의 재집권을 막았다.

그러나 1987년 양 김(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518 주범을 응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놓쳤다.

1990년대 후반 IMF란 국가 초유의 경제 사태로 김대중이 김종필과 손잡고 정권을 잡았지만, 김대중은 아들의 비리 문제로 발목 잡혀 근본적인 정치변혁을 이루지 못하고 집권 말년 식물정부로 전락했다.

2000년대에 풍운아 노무현이 정치 지형의 절대 열세 상황에서 진보세력의 적극 지지에 힘입어 아주 의미 있는 집권을 했다.

노무현은 몇몇 독단적인 정책으로 진보세력이 분열하게 해 정권 재창출을 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비극적인 종말을 선택했다.

포악한 독재자의 딸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집권한 박근혜는 무능에다 무책임하고 오만에 빠졌다.

그러자 인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을 바로 감옥에 보냈다. 이 무혈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에 버금갈 세계사의 희귀 사례로 꼽힐 것이다.

그렇게 귀중한 촛불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은 집권 4년 차에 노무현의 운명을 반복하는 듯한 암운이 드리울 듯하다.

정리해 보자.

1960년 419 혁명,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 민중혁명, 1987년 610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2002년 노무현 선거혁명, 2017년 촛불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의 펄펄 끓는 개혁 의지는 세계사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인민의 열망을 낭비한 혹은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 여태까지의 지도자 역량을 솔직히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스 속담이다. ‘같은 돌부리에 두 번 넘어지면 어리석은 자다.’

문재인은 이제라도 개혁 의지를 살려 노무현이 넘어진 그 수구의 돌부리에 절대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넘어진다면 개인의 불행을 넘어 인민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것이다.

내년 대선에서 ‘인민의 열망을 더는 낭비하지 않을 지도자’를

지금부터 우리는 반드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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