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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침략, 프랑스도 도왔다일본은 우리나라 재침략의 야욕을 버린 적이 없다.
공관 객원기자 | 승인 2021.04.08 21:38

 

글: 공관(북동중앙아시아 연대 중앙위 의장)

 

 

일본 근대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인 보아쏘나드,

조선 중립화론을 처음 일본에 제안한 것으로 드러나

임오군란과 강화도조약에 깊이 관여한 이노우에 코와시,

이토 히로부미, 보아쏘나드를 거치며 조선 중립화론 주도

강화도조약의 ‘조선 독립국’ 조항과 조선 중립화론 주장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지나지 않아

 

 

 

 

▲ 사진 오른쪽이 프랑스인 보아쏘나드(Gustave Emil Boissonade de Fontarabie, 1825~1910), 오른쪽이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1844~1895년). 이 두 인물이 조선중립화론을 이끌었다. 조선중립화론 속에는 청나라에서 조선을 떼어낸 뒤 일본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편집인 주)

 

한반도중립화안’을 처음 일본에 제공한 사람은 프랑스인 보아쏘나드였다(3)

일본제국의 ‘조선중립화’

보아쏘나드는 프랑스의 법학자였다. 메이지 일본 정부는 각 분야에 외국인 초빙사를 두었다. 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법률과 외교 고문으로 활약했다. 그(Gustave Emil Boissonade de Fontarabie, 1825~1910)는 일본 근대법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87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04년 러일전쟁까지 21년간 일본에 거주했다. 그가 메이지 일본에 ‘한반도 중립화(조선)’ 아이디어를 최초로 준 사람으로 생각된다.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 때 그는 ‘한반도 중립화론’을 일본의 유력자들에게 제공하였다. (*1) 유럽의 중립국인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2)를 참고한 것이다.

그의 이 발안(發案)은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한 몇몇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과 영국인 못지않게 러시아를 두려워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후유증이다. 보아쏘나드도 공러의식(恐露意識)에 바탕하여 러시아 남진을 봉쇄하기 위해 한·청·일의 협력으로 주장하기도 했었다.

“보아쏘나드는 … 1882년 9월 22일에 쓴 「영구중립에 관한 의견서」라는 글에서, 특히 러시아를 경계하여 청·러시아·일본 3국을 중심으로 한 관련 국가들의 인정에 따라 한반도가 영세중립화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3)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1844~1895년)는 메이지 일본제국의 뛰어난 행정관료였다. 법제국 장관과 문부대신을 지냈다. 그는 일본 법률외교 고문역인 보아쏘나드와 교류했다. 임오군란(1882년) 후 그가 보아쏘나드와 함께 ‘조선중립화안「朝鮮政略意見案」’(*4)을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 청국, 영국, 미국, 독일의 5개국이 공동으로 조선이 독립·중립국이 되도록 조약을 체결할 것을 구상했다.

그는 벨기에나 스위스의 예와 같이 조선도 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때 5개국이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국이 종주국이 아니라 5개국과 같이 보호국이 됨을 상정한 책략이었다. (*5) 이것을 일본 외교부를 통해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이때의 중립화의 목적은 조선을 중국(중국)의 속방(屬邦)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일본의 군사력이 중국(청)에 미치지 못했다.

이노우에 코와시는 조선문제에 밝았다. 강화도사건으로 촉발한 1876년의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에서는 정원법제국(正院法制局) 이등 법제관으로 일본 본국에서 모든 조약문을 초안하여, 일본국 협상대표인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년)에게 제공하였다.

또한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한 ‘제물포조약’(조일강화조약) 체결 때(1882년)는 참사원의관(參事院議官)으로 직접 참석하여 강화도조약에 이어 조선에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케 한 실질적 장본인이었다.

그가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국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한 것은 중국(청)과 속방/종주의 관계인 조선을 청으로부터 갈라 쳐내는 일본의 책략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조선 내부 친일 개화파 부식(扶植)의 좌절

일본이 의도한 조선의 종속화 추진의 초기 단계인 청국으로부터 조선을 때어내는 외교전략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 내에 문명개화론을 앞세운 반중친일세력(背淸親日開化派)의 부식이었다. 강화도조약 6년 후 조선에서 발생한 임오군란(1882)은 그러한 흐름을 반전시켰다. 청이 조선의 실질적 종주국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중국(청)은 조선과 베트남을 두고 일본과 프랑스 야욕을 제어하기 위해 명목상의 속방론 즉 자주적 속방론에서 실질적 속방론을 일방적으로 강화하여 밀어 부쳤다.

강화도조약에서 조선은 ‘자주국가’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청국의 속방임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전략에 큰 장애가 생긴 것이다.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야기된 1882년의‘제물포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여전히 청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절감했다. 실지로 김홍집은 일본과 회담하기 전 청국의 마건충과 조약 조문을 상의하였다.

일본이 요구한 일본군의 한국 주둔은 중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들이 강화도조약에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것은 명목일 뿐 조선의 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있음을 절감했다.

임오군란 사후처리를 두고 청국과 일본은 조선을 제외시키고 도교에서 양국회담을 가졌다.

그 회담에서 청국은 조선의 청국종속관계(淸韓宗屬關係)를 주장했고, 일본은 국제법(만국공법)을 빙자하면서 조선의 독립론을 재차 제기하였다.(*6)

일본이 조선의 독립론을 주장한 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서 주장한 것이 아니다. 중국(청)의 영향권으로부터 조선을 떼어내기 위한 일시적 방편이다. 그 후 동양평화론 운운했듯이.

이러한 일련의 조선 정국 변이에 참여하여 정통한 이노우에 코와시가 보아쏘나드가 준 ‘조선중립화안’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을 둘러싼 이러한 양국 간의 상반된 주장은 급기야 일본조야의 초미의 관심사로 주목받았고,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청의 속방론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이 제기한 것이 ‘한반도 중립화구상’이었다.”(*7) (계속)

(청일전쟁 전) 1889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안전 보장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위협이 한반도에 미치지 않도록 조선의 중립화(*1890년 「外交政略論」 를 구상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청나라와 영국과의 협조를 모색하고 특히 청과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조선중립화안’은 일본의 조선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대조선정책을 직접 담당하고 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외무경과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주조선일본공사의 저간의 외교행각에서 찾을 수 있다. 다케조에는 1884년 10월 30일자로 재부임하면서

“나는 조선을 장차 영구국외중립국으로 할 것이다. 조선을 스위스·벨기에와 같은 하나의 영구국외중립국으로 하려는 것은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이 항상 희망하는 바였다”(*8)라고 하는가 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2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벌인 전쟁(淸佛戰爭1884∼1885)의 대요를 설명하면서 “만약 베트남이 프랑스에 기울어지면 청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고 청국에 기울어지면 프랑스와 싸우게 되므로 서양의 예를 본받아 국외중립을 해야한다”고 설득한 일이 있다.(*9)

“이처럼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각계에서 제기된 ‘한반도중립화론’에 대하여 그 성격을 종합 검토해 보면, 한결같이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자력으로 조선을 지배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 경쟁관계에 있는 세력들과 제휴하여 어느 단일 세력에 의하여 독점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중립화를 활용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에 대하여 ‘그것은 오로지 열강의 세력균형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실현시키고자 한 일본의 1880년대 대조선 정책의 주류적 위치였다’라는 소수의 반론이 있지만,(*10) 실제에 있어서는 침략의도를 대전제로 한 일시적인 제안으로 조선의 안전보장과 독립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을 뿐이다.” (*박희호. 역사넷)

김옥균·박영효 등의 친일개화당이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조선의 정국국면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에 일본의 이 안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는 동안까지, 그들의 한반도 강제 병합(1910년)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포함하여 어른거렸다. (계속)

참고

(*1: 『Japan at War: An Encyclopedia』 Louis G. Perez. 2013. 30쪽)

(*2: 스위스 비엔나협약(1815) 무장중립국, 벨기에 런던조약(1831, 1839) 비무장중립국), 룩셈부르그 런던협약(1867) 중립국)

(*3:朴熙琥 우리역사넷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15쪽)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

(*4): 明治外交と朝鮮永世中立化構想の展開. 熊本大學學術

https://core.ac.uk/download/pdf/57735529.pdf

(*5:오카모토 다카시 岡本 隆司 『世界のなかの日清韓関係史 交隣と属国、自主と独立』 講談社〈講談社選書メチエ〉、2008年。126쪽)

(*6: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15(東京:日本國際連合會, 1947∼1954), № 102∼107, 163∼176쪽.) 우리역사넷 재인용.

(*7: 박희호, 신편한국사 근대 외교활동 우리역사넷 15쪽)

(*8:박희호≪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上, 260쪽.)

(*9:상동)

(*10:大澤博明,<朝鮮永世中立化構想と近代日本外交>(≪靑丘學術論集≫12, 東京:韓國文化硏究振興財團, 1998), 179∼229쪽.)

2021.03. 20. 공관

 

공관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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