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제주43학살 반공 토왜치하에 있다.

글: 은영지(사드철거투쟁위 간사)

 

미군정의 딘 소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주도 땅이지 제주도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는가 하면

군사고문단장은

"우리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는다. 최대한 빠르게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이 주요한 일"라는 섬뜩한 망언을 줄줄이 내뱉으며 미제 꼭두각시 이승만 정권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에게 무자비한 살육을 명령함

 

▲ 올해 서기2021년은 제주43집단학살 73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붉은 동백 꽃잎은 제주43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제주 4.3에서 소성리로>

온몸이 총탄에 맞아 벌집으로 변한 사람 머리가 돌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사람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빠져나간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손톱 발톱 이빨과 혓바닥이 모두 뽑힌 사람 두 젖가슴이 모두 잘려나간 사람 서북청년단... 팔짱 낀 미군 장교들에게 충성이라도 하듯 니뽄도로 시체를 쿡쿡 쑤시며...

<이산하의 한라산 일부>

73년 전 제주 4.3 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제주 도민들이 이렇게 짐승처럼 처참하게 죽어갔다.

공식집계는 14,032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훨씬 많은 3만명에서 8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무장대라고 해봐야 고작 500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선량한 양민이었으며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설령 시위를 했다 하더라도 조국의 분단을 영구화할 계략을 세운 미제 하수인인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주를 외친 게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미군정의 딘 소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주도 땅이지 제주도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는가 하면 군사고문단장은 "우리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는다. 최대한 빠르게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이 주요한 일"라는 섬뜩한 망언을 줄줄이 내뱉으며 미제 꼭두각시 이승만 정권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에게 무자비한 살육을 명령했다. 

4.3사건은 미국이 전세계에서 저지른 만행 중 작은 섬에서 일으킨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제노사이드(집단학살) 현장이었다.

이후 공포와 광기어린 폭력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미제와 독재자의 서슬퍼런 총칼이 두려워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기나긴 세월을 피울음을 삼키며 입 다물고 살아왔다.

소설가 김석범은 이를 두고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지만 해방 후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저지른 미제국주의의 만행과 폭력은 그칠 줄 몰랐고 지금까지도 몸서리칠 만큼 계속되고 있다.

제주도는 미제 해군 기지와 공군기지 만드느라 주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토요일 아침 소성리 진밭교 불법사드기지 평화행동에선 4.3항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강형구 장로님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미점령군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땅의 민중들의 안전과 행복, 평화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어요.

그저 대중국 대러시아 전투기지가 필요했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외곽 방어기지로서 한반도가 필요했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악마적 속성을 드러낼 뿐이었죠.

미국방 장관 등 관리들이 다시 이곳 소성리를 향해서 그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는 얘기를 하고 갔지요. '너네들 사드기지 방치하고 있다.

동맹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사드기지 통행을 막아선 주민과 지킴이들을 방치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에 불만을 드러냈어요.

이는 곧 사드를 반대하는 우리들이 출몰하지 않도록 조치하라고 하고 안 그럼 4.3때 제주도에서처럼 '묻지마 학살'을 지시하는 듯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악마성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이땅에 사드기지가 누구를 위해 건설되었고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가 분명히 증거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이 길위에 몸을 던져 막을 것이고 끝까지 투쟁하며 여기에 뼈를 묻겠습니다. #국제깡패 #미국은 #물러가라. #집단학살의 #원흉 #미국은 #물러가라. #점령군 #미군은 #물러가라" 소성리 주민 소야 훈님도 분노의 함성을 이어갔다.

"제주 4.3과 소성은 하나다. 악마 같은 미국의 만행을 용서하지 않겠다. 사드 뽑을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4.3항쟁에서 희생된 억울한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묵상 시간을 가졌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4.3항쟁의 분노를 잊지 않고자 광주항쟁을 기리는 오월가를 반주에 맞춰 함께 불렀는데 목이 메여와 꺽꺽 소리를 냈다.

사드기지 앞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무리들이 비명속에 스러져간 제주 도민들의 환생 같아 가슴이 벅차 올랐다. 꽃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슬픈 비였다.

그 놈에 해방 (고희림) 애가 어리숙해서 농사나 제대로 지을라나 싶었다 너무 착해빠져서 속도 썩이지 않았다.

동네 사상가 선배 따라다니더니 들로 산으로 갔다 배고파 가끔, 야반에 집에 왔다 새벽길 떠나는 녀석 보니 몸이 똑바로 서고 속이 깊어져 보였다.

까짓 놈이 뭘 알고 얘기하는지 ‘아부지, 어무이 곧 우리 농민이 해방됩니더 우리 조국은 원래 하나라예‘ 미덥지는 않았지만 못 믿을 얘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을 마지막 본 건, 잡혀가 대구형무소 면회장에서였다 그리고 또 가창골에 끌어 묻었다는 소문만 듣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여편(옆편)의 눈물 속에서였다 이놈을! 돌아오면은 요절을 낼라캐도 와야 우예 해 볼거 아이가 (4.3 사건 관련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된 제주도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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