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단군)의 강역에서 절대적으로 많이 출토되...

조선(단군)의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조선의 화폐, 명도전...

고조선은 아득한 옛날 우리민족이 최초로 세운 나라다. 주류역사학계는 고조선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일반인들은 고조선이 짐승들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미개한 시대였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옛 역사책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에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주류 역사학계는 기원전 10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우리 옛 사서의 기록이 타당하다고 논증하였다.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에 대해서도 주류사학계는 지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나라였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과 윤내현 등은 서쪽으로는 북경 동북쪽에 있는 난하부터, 동북쪽으로는 만주 북쪽의 아르군 강과 흑룡강 이남, 남쪽으로는 한반도 전부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밝혔다. 학문적 정치성에 비추어 윤내현의 논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실상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시 경제를 연구를 연구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조선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조선에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면 그 경제발전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체제도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범금8조(犯禁八條) 중에 “도적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을 내야한다”는 조항이 있다. 50만은 화폐단위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가치는 알 수 없지만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조선 화폐에 관한 자료가 드물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몇몇 자료에서 그 실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낙빈기(駱賓基)가 1987년에 발표한 금문신고(金文新攷)이다. 금문은 청동기에 쓰여 있는 글자인데 한자의 초기 형태이다. 낙빈기는 다음 사진에서 보는 청동기가 호미처럼 생긴 화폐인 조패(鉏貝)라고 보았다. 이 조패가 중국 전설 시대 첫째 임금인 신농(神農)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논증했다. 신농의 재위기간이 기원전 2517-기원전 2474년이니 기원전 25세기에 만들어진 청동화폐이다. 이 시대에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화폐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조패와 모양이 비슷한 청동화폐인 첨족포(尖足布) 등은 주(周)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

▲ 조패, 김대성의 『금문의 비밀』 50쪽

신농과 고조선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여러 역사서와 우리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고조선과 중국 고대왕조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왕조 중에서 은(殷)나라까지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조패는 인류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만든 화폐일 것이다.

고조선에 화폐가 있었다는 자료는 환단고기에도 실려 있다. 제4대 오사구단군 재위 5년(기원전 2133년)에 “가운데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주조”하였다. 이 기록과 조패는 약 400년 시차가 있으나 같은 동이족 나라에 화폐가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들이다. 당시 청동 제조 기술이 있었는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최근 고고학 발굴 성과에 의하면 기원전 24세기까지 청동기 제조 상한이 올라가니 무시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 원절식 명도전과  방절식 명도전

은나라 중흥군주인 무정(武丁, 재위 기원전 1250-기원전 1192년)의 왕비인 부호(婦好)의 묘가 하남성 안양에서 1976년에 발견되었다. 부호는 무정의 왕비이면서 군사령관으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여걸이었다. 2013년에 중국 산서성과 하남성을 답사하는 여행에서 필자는 부호의 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안내문에는 부호를 동이여장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묘 앞에 무기를 손에 든 예쁜 부호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묘의 부장품으로 전시된 유물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이 하얀 바탕에 까만 점이 있는 무당벌레처럼 생긴 작은 조개껍질 화폐였다. 부호 묘에서 6,800여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조개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귀한 마노조개 껍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노조개 껍질은 오늘날에도 가공하여 목걸이 등을 만드는 소재다. 돈을 의미하는 한자가 조개 패(貝)인데, 이 글자의 기원이 조개를 본뜬 상형문자이다. 기원전 15세기 동이족의 나라 은에 화폐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은나라 다음 주나라 시기 후대인 춘추전국 시대에 중국에서는 금속화폐의 사용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 각 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화폐는 조패와 비슷하거나 칼처럼 생긴 도전(刀錢)이다. 도전은 주로 연(燕), 제(齊), 진(晉)나라와 융적(戎狄)과 산융(山戎)에서 사용했다. 연과 제는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융적과 산융은 중국의 동북쪽에 거주한 이민족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를 건설했는지 중국 역사서는 밝히지 않는다. 당시 중국 동북쪽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는 고조선 밖에 없기 때문에 산융은 고조선이 틀림없다, 오늘날에도 중국학자들은 고조선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산융 또는 동호(東胡)로 쓴다.

▲산융의 명도전

(자료: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8쪽)

▲ 일반적인 모습의 명도전

(자료:유비연과 단경고의

『동주전폐』(2012) 56쪽)

각국의 도전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연나라 도전이 명도전(明刀錢)인데 이는 도전에 새겨진 글자가 아래 왼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明(명)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확하게 무슨 글자인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명도전은 중국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하북성, 내몽고자치구, 한반도 등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들은 고조선과 연나라 강역이었다. 그래서 고조선은 연나라 돈인 명도전을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명도전이 연나라 지역인 하북성에서는 소량이 출토되었지만 고조선 강역에서는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북한학자 손량구의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 지역에서 22,265개, 연나라 지 역에서는 7,368개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다. 박선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명도전 출토지역은 고조선 지역임을 나타내는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일치한다. 연나라보다는 고조선에서 대량으로 유통되었으니 손량구는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기보다는 고조선 화폐라고 주장했다.

주나라 무왕이 동생 소공(召公) 석(奭)을 기원전 1122년 제후로 봉한 곳이 연나라인 데 오늘날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기원전 323년 왕을 칭하고 제후국에서 왕국이 되었다. 진개(秦開)의 고조선 침략과 격퇴 등 연나라와 고조선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다. 연나라는 110년 간 존속하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한 고조선이 겨우 100여 년 존속한 적국의 화폐를 자국의 화폐로 사용했다는 종래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의문이 든다.

명도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몸체가 곡선인 원절식(圓折式)과 직선인 방절식(方折式)이 있다. 이 중 원절식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 중국 길림대학 장박천(張博泉) 교수가 주장했다.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의 다수가 원절식이다. 같은 원절식이라도 끝이 뾰족한 명도전도 있다. 앞의 사진에서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을 비교해보면 몸체가 곡선이라는 점에서 원절식 명도전과 산융의 도전은 유사하다. 산융이 고조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이 이 화폐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청동기로 조패를 만든 시기가 기원전 25세기임을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부터 사용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조선은 신화 속의 미개한 국가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강역이 넓고 화폐를 사용하는 발전된 경제체제를 유지한 국가였다.

글 : 허성관(前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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