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대북폭격 강경파 부시를 햇볕 정책 지지자로 만들었다.

 

 

즉흥적, 충동적, 우발적인 트럼프는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 안 돼

30년 외교 경력의 외교능력과 정치경력의 예측 가능한 바이든이 나아

바이든은 북미 관계 최악상태 부시 때 김대중을 만나 햇볕 정책 찬성

대북 강경, 붕괴론자 부시를 1시간 이상 설득해 남북교류 지지 받아내

 

▲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의원(현재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자료: 대통령 기록실

지금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개표가 거의 마무리 돼 가고 있다. 막판 역전을 펼치고 있는 바이든은 승리를 낙관하고 있다. 반면에 트럼프는 대법원에 개표 중단 등 선거에 이의를 제기해 미국 대선 국면이 당분간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대미종속 사대주의를 해 온 터라, 미국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가에 따라 한땅(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바뀔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치 자국 대통령 선거만큼이나 언론들이 앞을 다퉈 보도하는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왜 우리의 운명이 미국에게 달린 듯이 호들갑을 떠냐는 것이다. 왜 스스로 우리 운명을 개척할 생각을 안 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김대중 대통령이 반미가 아닌 용미用美에 성공한 일화가 주목받고 있다. 김상수 작가가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남한의 대북정책에 동의, 지지하도록 설복시킨 일화를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 작가는 자신의 얼굴책(facebook)에 글을 올려 트럼프보다는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한국에게 이익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김 작가는 트럼프와 달리 외교 분야 정치 30년 경력의 바이든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또 트럼프가 자국 이익 우선주의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세계에는 도움보다는 해가 됐다고 평가했다. 인류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세계보건기구, 유엔 인권위원회, 파리기후변화 조약에서 제멋대로 탈퇴한 것을 들었다.

서기 2001년에 미국 공화당은 대북 강경노선을 견지했는데 민주당 바이든은 대북협상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이어 조지 부시가 민주당 고어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자 대북 강경책을 펼쳤다면서 햇볕 정책을 펼치던 김대중 정권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폭격까지 주장하는 부시를 어떻게 설복시켜 거꾸로 자신의 남북 전면 교류와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착한 학생’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당시 일화를 상세하게 전했다.

부시가 당선되고 첫 전화 통화를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포용 정책을 열심히 설명하고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 부시 곁에서 이 통화를 듣고 있던 당시 찰스 프리처드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부시가 김대중 대통령과 통화하다 말고 거슬리는 말로 들렸는지 송화구를 막고 배석한 사람들에게 “이자,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이라고 말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인물인지 보고서를 작성케 하고 읽어보더니 흥미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한 부시의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어 으레 그렇게 해 왔듯이 미국 대통령이 새로 당선되면 우리가 먼저 미국으로 가서 미 새 대통령과 정상 회담한다. 이때도 김대중 대통령이 먼저 가서 부시를 만나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도 부시는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강경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잘못하면 지난 클린턴 정부를 설득해서 해오던 남북 전면 교류 정책이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 유명한 부시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무례 발언이 나왔다. 정상 회담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하는 말을 가로채면서 '이 사람(This man)' 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명박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뒤집어엎어 버렸듯이 부시도 클린턴 정권의 북미대화정책을 전면 중단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서기 2002년 2월 한국을 방문했다. 이해 2월 20일 드디어 정상 회담이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기회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고 한다.

햇볕 정책과 북미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부시도 이에 지지 않고 대북 강경정책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붕괴시켜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김 작가에 따르면 이날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미국의 대외정책 사례를 조목조목 들면서 부시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러시아를 '악의 제국'이라 지칭했지만 화해를 추진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전범'으로 규탄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하여 개혁 개방을 유도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 때문에 대화할 때는 해야 합니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공산당과도 대화했습니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살길을 열어주면 북한은 핵과 대량 살상 무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북한에 기회를 주시오.”

부시의 반응은 어땠을까. “좋은 유추”라고 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부시를 파고들었다. 김 작가는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 정책 이후 남북이 상호 비방 및 도발 중지, 이산가족상봉등 구체적인 성과가 있었고 한국민 8할이 지지했다며 부시의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 정책은 유화 정책이 아닙니다. 강자만이 추진할 수 있는 공세적 정책입니다."라고 하여 부시 마음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게 되면 전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 국민은 전쟁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분명한 의사를 전했고, 이어 미국 국방성 자료를 가져다가 전쟁의 참혹상을 각인시켰다고 한다. 전쟁 발발 3개월 이내에 한국군 50만 명, 미국 5만 명, 민간이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것이라고 밝혔다.

또 산업시설 대부분이 파괴될 것이라고 주지시켰다. 그러면서 전쟁은 우리가 승리하겠지만 이러한 참화는 막아야 할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고 한다.

김 작가는 “김대중은 최선을 다해 부시를 설득했다. 그것은 부시의 대북정책이 얼마나 단견인가를 지적하는 가르침이었다. 태도는 겸손하고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창이 숨어 있었다. 김대중은 공격에 부시는 마땅한 방패가 없었다.”라고 하며, “부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해했다.’ ‘지지한다.’, "좋은 지적이다" 등뿐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2001년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을 변방으로 보고 김대중을 그저 그런 지도자로 봤던 자신의 시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라고 평가했다.

이날 정상 회담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길어졌다고 한다. 주변 참모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직감했다며, 회담이 끝나고 양국 정상이 나타났는데 부시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고 한다.

평소 천진한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는데 빨개진 것을 보고 미국 외교관들은 의아해하고 불안했지만, 우리 수행원들은 안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와대 비서 김선흥은 당시의 부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고 전했다.

"교무실에 불려가 주의를 단단히 듣고 나오는 학생의 표정 같았다."

정상 회담을 마치고 공동 기자 회견장에 나온 부시는 '김대중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 지원을 계속하겠다."(김택근 <김대중 평전>)

이와 같은 일화를 볼 때 전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부시를 완전히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신의 확고한 주관과 철학이 있었고 진심을 다해 상대방과 공감하며 설득을 했기에 가능했다. 마치 고려의 서희가 적으로 쳐들어온 거란을 설득해 싸우지 않고 강동 6주를 차지한 것과 비교된다.

이는 현재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되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되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최근 역사의 소중한 사례다.

 

다음은 김상수 작가의 글 전문이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의 단견이 때때로 대중 일반에게 그릇된 여론을 형성시킬 수 있다. 올해 2020년 7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한 방송에 나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남북관계에)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나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본다. 트럼프 식의 준비 안된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며 우발적인 북미 대화 방식은 남북이나 북미의 외교에서 거의 실효가 없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지난 2년 이상 엄청난 기대를 하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만약 트럼프 식의 일괄타결(topdown)방식이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왔다면 다행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 상원 외교위 위원으로 외교 경력 30년의 실무형 바이든 외교가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차분하게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방식이 더 실질적인 효과가 있고 더 지름길일 수 있다고 나는 본다. 트럼프 환상은 접어야 할 때다.

최근 선거 직전 바이든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는 것은 “갈취(extort)”라고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고립시켰다면서 “미국의 평판과 영향력은 누더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미국 우선주의는 종료 되어야 하고 동맹국과의 관계 개선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특히 한국과의 동맹을 강조했다.

바이든은 또 세계보건기구(WHO), 유엔 인권위원회, 파리 기후변화협정 등 트럼프가 독단적으로 탈퇴한 국제기구와의 협정에 복귀하겠다고 발표했다.외교를 상호 호혜의 관계로 복원시키겠다는 것이다.

2001년 8월 11일 바이든 미 의회 상원 의원은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날 김 대통령은 한국의 대북한 ‘햇빛 정책’을 강조했고 바이든 의원은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말한 공화당 부시가 대통령 임기 1년 차를 막 시작하던 시기였고 북미 관계는 최악의 상황인 때다.

바이든 외교위원장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기 3개월 전인 2001년 5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가 주최한 부시 행정부 출범후 첫 대북정책 청문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청문회에서 바이든 의원은, 당시 공화당의 제시 헬름스(Jesse Helms) 의원이 북한 독재정권의 성격을 공격하면서 "침략과 무기 확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고 초강경 입장을 내비쳤다. 반면 민주당의 조 바이든 의원은 클린턴 전 행정부의 북미 협상의 정책 기조 위에서 대북협상의 필요성을 차분하게 역설했다.

19년 전으로 잠시 돌아가자, 2000년 클린턴 정부 말기 때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1월 선거에서 민주당 고어가 대법원 선거 결과 판결로 공화당 부시에게 패배하고 냉전주의자 부시가 새로운 미국의 대통령이 됐을 때 ‘햇볕 정책’은 엄청난 시련과 마주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의 벽’을 뚫고 앞으로 나갔다. 어쩌면 19년 전 그 당시 부시 공화당 때나 이후 오바마 시대의 ‘전략적 인내’로 북미 관계를 의도적으로 닫아버렸던 그 시기와는 오늘 사정은 다르다. 진정성은 의심스럽고 실재하는 성과는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미 정상으로 트럼프와 김정은은 3차례나 서로 마주 앉기도 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자, 그럼 19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체재를 악마의 독재체제로 규정한 냉전주의자 공화당 부시와 어떻게 무슨 전략으로 만났을까?

”2001년 1월 25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화 통화를 갖고 "가능한 빨리 한미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부시 취임 닷새 후였다. 당시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은 김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상하이 방문에서 선보인 "새로운 사고"를 강조하면서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대북포용정책 공조에 나서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백악관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당시 국무부 대북교섭 특사로 두 정상의 전화 통화를 곁에서 지켜본 찰스 프리처드의 <실패한 외교>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가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할 필요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이라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부시는 프리처드에게 김대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프리처드는 밤샘 작업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부시에게 보고했지만, "대통령의 시각을 바꾸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때 나는 부시 대통령이 취한 행동과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대화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40일 후 김대중-부시의 재앙적인 정상회담의 불씨는 이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정욱식의 '모순과 악연' 다시 보는 김대중-부시 정상회담)

드디어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부시를 대면한다.

김택근 언론인이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 집중 인터뷰를 통해 저술한 <김대중 평전 '새벽'·47 - 햇볕과 광풍> 편을 보면, 한미 정상회담이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그만 본심을 털어놓는다.

“나는 북한 지도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 모든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

"대북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

부시는 김대중의 답변도 가로챘다. 또 디스 맨(This man)이라 호칭했다. 김대중은 매우 불쾌하면서도 불길했다.

부시는 네오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등이 대북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클린턴과 민주당의 노선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신조어가 나돌 정도였다. 즉, 클린턴 대통령이 해놓은 것들은 모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황당하고도 분했다. 그날 통역을 맡았던 강경화는 그날 김대중의 얼굴이 매우 어둡고 슬퍼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반드시 부시를 설득해서 그를 굴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2002년 1월 말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정했다.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할 대상'이라 선언했다. 북한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했다. 북한과 미국 관계는 다시 무력 충돌 위기로 치달았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남쪽에서도 반미 감정이 일어났다. 미국의 무력 사용은 한반도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김대중 정부는 과거 군사 정권과 달랐다. 국민의 선택한 민주 정부였다. 한국 내 반미 감정이 일고 있음은 미국에게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마침 2002년 2월 하순 부시의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김대중은 정상 회담을 통해 부시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철저하게 준비했다. 김대중은 벼르고 별렀다.

2월 20일 아침, 마침내 김대중과 부시가 마주 앉았다. 정상 회담은 예정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을 초과했다.

김대중은 햇볕 정책을 다시 설명했다. 그리고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처음에는 부시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기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독재자입니다.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북한 체제를 붕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서울 방문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는 것입니까."

부시의 공세적 질문은 김대중에게는 호기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러시아를 '악의 제국'이라 지칭했지만 데탕트를 추진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전범'으로 규탄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하여 개혁 개방을 유도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에 의해 대화할 때는 해야 합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공산당과도 대화를 했습니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살길을 열어주면 북한은 핵과 대량 살상 무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북한에 기회를 주십시오."

부시는 "좋은 유추"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중은 햇볕 정책 이후 남북이 상호 비방 및 도발 중지, 이산가족 상봉, 인적 왕래 증가 등 가시적인 성과가 있음을 설명하고 국민의 80퍼센트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햇볕 정책은 유화 정책이 아닙니다. 강자만이 추진할 수 있는 공세적 정책입니다."

김대중은 휴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군사 도발을 응징한 연평해전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데탕트를 추진하고 있음을 주지시켰다. 또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것인지도 지적했다.

"우리 국민은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곧 전면 전쟁으로 확전될 것이 분명합니다. 펜타곤은 전쟁 발발 3개월 내에 한국군 50만 명, 미군 5만 명, 민간인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산업 시설의 대부분이 파괴 될 것으로 예측한 바 있습니다. 전쟁은 우리가 승리하겠지만 이러한 참화는 막아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최선을 다해 부시를 설득했다. 그것은 부시의 대북 정책이 얼마나 단견인가를 지적하는 가르침이었다. 태도는 겸손하고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창이 숨어 있었다. 김대중은 공격에 부시는 마땅한 방패가 없었다. 부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해했다." "지지한다" "좋은 지적이다" 등 뿐이었다. 부시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을 다시 봤다. 2001년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을 변방으로 보고 김대중을 그저 그런 지도자로 봤던 자신의 시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회담이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길어지자 밖에서 기다리는 한·미 양국의 외교관들은 극도로 긴장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회담이 끝나고 양국 정상이 나타났다. 그때 부시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천진한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그걸 보며 의아해하거나 불안해했지만 한국 수행원들은 내심 안도했다. 청와대 비서 김선흥은 당시의 부시 모습을 이렇게 술회했다.

"교무실에 불려가 주의를 단단히 듣고 나오는 학생의 표정 같았다."

정상 회담을 마치고 공동 기자 회견장에 나온 부시는 '김대중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 지원을 계속하겠다."(김택근 <김대중 평전>)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한국의 대북한 관계가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가정은 근거가 없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현실을 잘못 읽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한국이 한국 정부가, 문 대통령이, 더 한층 주도적으로 지혜롭게 현실을 극복하고 돌파하는 가에 달렸고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때로는 주체적으로 비상한 결단을 통해 꽉 막힌 북미 남북 관계를 돌파해 나갈 것인가의 실력 외교가 관건이다. 이는 문 대통령이 계속 강조해온 한반도 운전자론이 현실에서 과감한 실행력을 지닐 때, 비로소 현실은 구체적인 비전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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