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을 따르면 이민족 정권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로 본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역사신화연구가)

 

‘단군신화’는 식민주의 역사관 잔재, 단군사화로 바꿔야

조선의 강역은 한반도 만주 요하 서쪽, 하북성 난하에 이름

조선은 도읍지를 옮겼는데 현재도 험독이라는 이름이 있어

조선의 시작점은 현재 평양일 가능성 커, 고인돌 집중 분포

북한학계 단군릉 발굴 5천년 넘은 부장 인골로 밝혀져 화제

 

▲ 북한 단군릉. 지금으로부터 5,011년 전이라니,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기전 2,333년보다 훨씬 앞선다. 윤내현은 고조선 이전 지배신분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단군신화 9

최남선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후반부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군신화를 역사와 완전히 분리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도 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단군사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단군 왕검은 고조선을 세운 분이어서 우선 고조선은 언제 어느 곳에 세워졌는지를 알아야 할 듯하다.

고조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러 논의가 계속중이나, 나는 윤내현 교수의 주장에 따라 요약하여 소개할까 한다.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상, 하는 각각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이므로 '논증'은 모두 생략하고 결론만 요약하여 옮기겠다.

- 근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조선의 강역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 서쪽으로는 북경 근처의 난하 유역, 북쪽은 아르군강, 동북쪽은 흑룡강 유역, 남쪽은 한반도 남부의 해안선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조선은 서기 전 24~23세기 무렵에 건국되어 서기 전 1세기 무렵에 붕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조선에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단군조선은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이 세운 나라이나, 위만조선은 서한의 망명객 위만이 세운 나라이고, 한사군은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조선의 뒤를 잇지 않았고, 고조선 서부 변경이었던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지만, 위만조선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마지막 준왕까지 모두 기자의 후손들이 다스렸다.

준왕은 은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던 기자의 후손이고, 기자조선은 고조선 서부 변방에 있던 거수국의 하나였을 따름이기 때문에 기자조선(준왕)이 멸망했다고 하여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서한 무제는 그곳에 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했고, 대릉하에서 요하 사이의 조선 땅을 차지한 후 그곳에 다시 현도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한사군은 모두 요하 서쪽에 있었다.

고조선이 붕괴한 후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 고구려, 옥저, 예맥 등이 모두 독립하여 열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윤내현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의 우리 문헌 사료를 활용하고, 중국의 여러 문헌 사료들을 대거 동원하여 논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기록들은 외국인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조작이라거나 고조선에 유리하게 기록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중요한 사료라고 하였다.

자세한 논증을 알고 싶다면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를 직접 참고하시면 되겠다.

다음에는 <삼국유사> 기록에 보이는 고조선 도읍의 이동을 윤내현의 주장을 통해 살펴 보겠다. 고조선 도읍지에 대한 윤내현의 주장을 요약해 보겠다.

-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다섯 곳으로 나타난다. 아사달•평양성•백악산아사달•장당경•아사달이 그것인데, 다만 위치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국 고대 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험독(險瀆)이라는 지명이 만주에 세 곳이 나타나고, 이들의 지리적 위치 확인도 가능하다.

따라서 고조선이 천도를 하게 된 사건들이 험독의 위치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그곳들을 고조선의 도읍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이용된 <위서>에는 처음 도읍을 아사달에 정했다고 하였고, <고기>에는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하였다.

원래 아사달은 '아침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평양은 '펴라'로서 '넓은 벌'을 의미하지만, 모두 왕읍 또는 대읍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창려의 험독현은 '위만조선의 왕험'일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구도(舊都)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이처럼 험독은 왕험성과 같은 도읍지에 붙여졌던 지명이다.

그런데 중국 문헌과 달리 <삼국유사> '위만조선'조에는 왕험성이 아니라 왕검이라 표기했다.

이로써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고대 한민족은 왕검성이라 불렀는데 중국인들은 왕험성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인들이 험독이라 표기한 지명은 검독(儉瀆)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검독에서 독(瀆)은 중국 음이 뚜(du)로서 터를 의미할 것이고 검독은 검이 거주하는 곳 곧 왕의 도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들의 도읍지를 왕검성이나 검독이라 부른 일이 없다. 말하자면 왕검성이나 검독은 원래 중국어가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 지역 거주민들의 토착어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왕검성보다는 검독이 더 원초적인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검은 검 자에다 통치자를 의미하는 왕 자가 더해져 만들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검성은 중국 망명객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에서 사용되었던 말일 것이고, 검독은 고대 한민족의 토착어로서 그보다 앞선 고조선(단군조선)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험독의 위치는 난하 유역 창려의 험독현,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 있는 험독현, 요하 동쪽 심양 동남지역의 험독현이다.

고조선은 원래 아사달이라는 명칭을 가진 '고을나라'(고대국가 이전의 추방酋邦국가)였는데, 그 도읍 이름도 아사달이었다. 당시의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은 원래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서 출발한 고을나라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평양지역은 40km 안에 수천 개의 고인돌이 있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분포지역인데,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유물로서 평양 지역이 청동기시대 초기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굴된 단군릉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5,011년 전이라 발표되었는데, 이 무덤은 매우 이른 시기 지배신분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평양의 고고 자료들은 고조선 건국 연대라고 믿어온 서기전 2,333년보다 앞선 청동기시대 초기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한 후,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아사달을 한자로 표기한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고조선 도읍지의 이동에 대한 윤내현의 설명을 요약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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