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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출발, 명치유신은 우연히 일어난 것아베의 일본 극우파 야스쿠니 참배는 한국 재침략 다짐을 뜻한다.
신종근 객원기자 | 승인 2020.10.30 21:37

 

글: 신종근(역사저술가, 의사)

 

명치유신은 처음부터 장구한 계획을 갖고 시작된 것 아냐

수 많은 난맥상이 얽혀진 가운데 완성한 뒤 포장한 것에 불과

다만 서구화할 정보를 갖고 있는 등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음

막부가 오래전부터 서구에 항구를 열어 놓고 서구변화 읽어

유신지사 개인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명치유신 성공한 것 아냐

 

▲ 일본 근대화의 신호탄이자 제국주의 출발이라고 알려진, 명치유신은 처음 부터 기획된 것이 아니라, 막부와 반막부세력간의 난투극 속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오사카의 여인> 열다섯 번째 이야기

메이지유신의 토양 - 에도막부(江戶幕府)

장구한 계획이 없었던 메이지유신

오늘날 메이지유신은 19세기말에 근대국가와 서구화를 달성한 것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흔히 유신지사들의 활동을 과잉하게 찬양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장구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유신은 너무나 많은 요인이 널려 있어서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 그들의 이상과 이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요소들에 의하여 아무런 역할이나 좌표가 되지를 못하였다.

수없이 많은 번(藩)과 중앙의 막부(幕府), 그리고 상급무사와 하급무사의 갈등, 일본 내에서도 지리적으로 너무나 다른 환경, 중앙집권화하지 못한 사회, 그리고 여기에다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개입과 농간, 서구문명의 도입과 그것에 대한 강박감 등 어느 하나 정리된 것이 없이 어지러운 환경이었다.

자연히 전국이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소란한 형국이었으며 이러한 불안정하고 전망이 뚜렷하지 않았던 상태가 지속된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난 다음 그 결과에 메이지유신이라는 깔끔한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있었던 유신지사들의 해외유학은 메이지유신을 말할 때면 맨 먼저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유신지사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외국문물을 흡수하려 시도한 것도, 에도막부(江戶幕府) 시절 오랜 기간동안 외국에 대한 상당한 정보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바탕이 이미 조성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의 에도시대는 절대로 쇄국 국가가 아니었음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일찍이 유럽을 포함한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세계의 강대국간의 세력다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에도시대 내내 꿰고 있었다.

이러한 에도막부 때 축적된 기반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가져온 바탕이었으며, 소위 유신지사 개인의 독자적인 능력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연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쇼인(吉田松陰)이 죽은지 12년 후인 1871년, 일본의 지도자들은 수행원과 유학생을 포함하여 106명으로 구성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을 구성하여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고 근대화 정책의 방향성을 찾기위해 약 2년 간에 걸쳐 정부 핵심의 자리를 비우고 서구를 순방하였다. 이제 더 이상 내전으로 인한 소모전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방문으로 일본은 여러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온 상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메이지유신의 주도세력 위주로 쓰여진 이야기일 뿐이다. 다음의 글을 살펴보면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의미가 실제와는 달리 많이 부풀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막부(幕府)는 1862년 14명의 네델란드 유학생을 파견한 이래 5년동안 62명의 유학생을 파견했다. 이에 질세라 조슈(長州)ㆍ사쓰마(薩摩)ㆍ사가(佐賀)의 번(藩)도 구미(歐美)에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사실 당시 번이 독자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유학생뿐만이 아니다. 1860년대 내내 다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해외 사절단을 파견했다. 막부가 보낸 사절단은 총 290명 가량이며 이들은 미국ㆍ유럽ㆍ러시아 등을 방문했다. 그 목적은 주로 비준서 교환, 국경문제협의,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 등 외교적인 것이었지만 여기에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공부 목적으로 동행하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그런 동승자 중에 한 명이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 때에는 겨우 27세였다. 이런 청년이 세계의 정세에 무슨 대단한 것을 알았겠는가?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었겠는가? 설사 그의 철학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완성도가 뭐 대단하겠는가?

결국 쇼인은 선동가이고 운동가였을 뿐이다. 쇼인의 업적이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초등학생 수준의 쇼카손주쿠의 생도들에게 위험한 사상을 전파해 나간데 불과하다. 문제는 쇼인의 가르침과 선동이 제자들에 의해서 실제로 실현되었다는데 있으며, 다음의 글은 그 핵심을 짚고 있다.

"메이지 정부의 그 방향성이 잘못된 것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왜곡된 사고와 이를 계승한 히데요시계 사무라이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쇼인이 구미(歐美)에 대해 박식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과대망상에 걸린 요시다 쇼인은 자기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신분열자였다.

이들은 히데요시계 번주(藩主, 다이묘)로서 조선에 출병한 사무라이들이며 그때의 전공과 전리품을 자랑하던 번주들이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대해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대단한 인물로 간주하여 지폐에까지 얼굴이 새겨져있지만 따지고 보면 서양을 모방한 제국주의자인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며, 특히 일본의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와 침략의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현재의 일본은 임진왜란의 히데요시의 침략정신과 메이지유신을 계승한 세력이다.

최근에 있었던 아베 총리의 쇼인 묘소 참배는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신호이며,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나 공물헌납도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지켜 나가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신종근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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