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 전시에 참여한 식민사학자 명단 밝혀야 한다.

글: 이주한(역사저술가)

 

 

북한학계의 가야사연구는 일제의 가야파괴를 드러내고 가야사복원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 이름만 부정, 내용은 그대로 추종

식민사학계가 새로 내놓은 듯한 임나일본부 변형설도 일제학자 작품

변형설은 그 모양새가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성격 풀이에도 드러나

“한사군은 식민통치기관이 아니라 한漢나라의 문화중계지나 전진기지”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조희승 지음, 도서출판 말)가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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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흔히 ‘수수께끼의 왕국’으로 불린다. 북한에서 한일고대사 연구에 매진한 역사학자 조희승은 가야가 600년 넘는 역사를 가졌음에도 그 형체가 불분명한 까닭을 우선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에서 찾는다.

경주김씨 자손인 김부식이 신라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신라에 통합된 가야를 하찮게 취급해 마땅히『사국사기』가 돼야 할 책을『삼국사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까지만 해도 오랜 역사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가야 관계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는데, 신라 이웃에 있던 가야의 역사를 김부식이 빼버렸다고 조희승은 논증한다.

그는 일제가 빈구석으로 된 가야사의 자리에 일본사를 밀어 넣어 가야를 일본사, 일본영토의 한 부분으로 외곡하면서(임나일본부설) 우리 역사가 무참히 짓밟히게 된 과정을 추적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한다.

2016년에 타계하신 최재석 선생님(전 고려대 명예교수, 한일고대사연구 권위자)은 가야사에 대해 이렇게 분석하셨다.

“지금까지 거의 전부 임나사 또는 가야사 왜곡의 첫발은 임나와 가야가 동일국이라는 증거가 아무 데도 없음에도 그 양자가 동일 국가라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한 데 있는 것이다.”

-최재석, 『고대 한국과 일본 열도』, 일지사, 2000, 425쪽

임나일본부설은 서기 4~6세기경에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적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일본에서 1868년 메이지 정부 이후 정한론이 발흥했다.

 

1880년에 일본육군 참모본부는『일본서기』의 조작 기사에 기초해 조선 침략설인 임나일본부설의 기본 틀을 만들고, 이후 도쿄제국대학에서 이를 이어갔다.

과거에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통해 조선을 지배했다. 조선은 일본의 고유영토다.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자.

이것이 일본 근대역사학의 출발점인 임나일본부설의 맥락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제 임나일본부설은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한·일 양국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중략)...그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주의를 긍정하는 대에 이바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설득력을 잃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10, 128쪽

위의 말처럼 일제가 창안한 침략론인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공언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럼 임나일본부설은 극복되고 폐기되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거나 경영했다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펴는 학자를 지금은 일본에서도 찾기 어렵다.

임나일본부설은 임나일본부가 교역 기관이었다는 설을 비롯해 외교기관설, 사신관설 등 변형 논리로 통용되고 있다. 이 같은 설도 황국사관을 기초한 구로이타 가쓰미 등이 오래전에 세운 주장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이런 주장을 마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새로운 이론인 것처럼 내세운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역사학자들이 동의한 것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사항인데, 극히 의미 없는 동의다.

‘일본부’는 8세기에『일본서기』 편찬자가 쓴 표현이다. 서기 4~6세기에는 일본이라는 명칭의 나라가 없었다. ‘일본’ 국명은 7세기 중엽 이후에 등장한다.

일본은 8세기 이후 통일국가를 이루기 시작한다. 형성되지도 않은 국가가 다른 국가에 어떤 기구를 설치할 수 있을까.

서기 4~6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이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중요하다.

임나가 한반도에 있던 가야라는 견고한 논리와 일본 우위설이 필요한 것이다. 잎새를 털고 가지를 자르면서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는 방식이다.

“한사군은 식민통치기관이 아니라 한漢나라의 문화중계지나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는 논리와 같은 선상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유지되고 있다.

한국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의 초기역사를 사료 근거 없이 부정한다.

4국이『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대로 서기전 1세기경과 서기 1세기에 국가로 발전했으면, 8세기 이후에 국가를 형성한 일본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경영하거나 우위에 선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 역사학계는 서기전 24세기경에 건국한 (고)조선 역사를 인정할 수가 없다. (고)조선 이전의 역사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역사연구가 1차 문헌 사료와 고고학 자료 등에 따른 귀납적인 연구 방법에 기초하지 않고, 임나일본부설에 따라 연역적으로 행해지는 관행이 일제로부터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조희승이 지적하듯 일제 학자들은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옛 가야 땅에 대한 대대적 발굴을 진행했다. 그들은 참빗으로 훑듯 물질자료를 찾기 위해 메주 밟듯 가야 땅을 밟았으나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꼬물만큼도 발견하지 못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 땅에 없었기 때문이다.

" 『일본서기』 임나 관계 기사를 대하는 우리의 립장과 일본학계의 립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중략)...야마또중심사관에 기초하여 8세기에 씌어진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기성관념에 포로되지 않고 사실에 맞게 고찰하려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다. "라고 정리한 조희승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일본렬도에서 벌어진 내용으로 일관되여 있으며 우리나라 력사와 일단 무관계하다는 전제에 서지 않을 경우 그러한 립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임나설을 비판한다고 나선 소장파 학자들일지라도 결국 그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402쪽 )

독자분들은『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를 읽으며 역사의 참모습과 새로운 통찰, 정연한 추리와 논리의 향연을 만끽하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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