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 맺힌 슬픈 시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다. 그 시기의 일제는 한반도에서 조선을 지워 없애려고 했다. 조선은 거기에 저항했다. 일제강점기가 말기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일제는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인을 일본인화하여 전쟁터로 내몰 작정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총알받이와 방파제로 삼을 터였다. 그런데 이 황민화 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총독부는 한국인들을 한 단계 더 조이는 정책을 내놓았다.

하나는 ‘신사참배’이다.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 9월이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 민중의 거부 움직임은 현저했다. 총독부가 이 운동을 봉쇄하려 했지만 한국 민중은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운동은 특히 종교계에서 거셌다. 기독교 신자들이 정식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성명을 냈다. 거기에 전국 기독교 신자가 호응했다. 총독부는 이 운동에도 철저한 탄압으로 임했다. 저항 신자들을 투옥시키고 수많은 교회를 폐쇄시켰다. 이 사건으로 목사와 수십 명 신자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다음은 ‘창씨개명’이다.

한국인 고유의 이름을 못 쓰게 하고 일본식 성명(즉 氏名)을 갖게 하는 정책이다.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40년 2월 11일부터 이 우매한 정책을 실시했다. 신고 기한은 6개월, 8월 10일까지로 정했다.

애초에는 창씨와 개명은 어디까지나 자의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식 성명을 신고하지 않으면 학교 입학은커녕 취직도 못하고, 배급도 받지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여행증명서도 발급 받을 수 없었다. 총독부는 일본 이름으로 고치지 않고서는 한국에서 생활할 수 없게끔 하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부득이 일본 이름을 관공서에 신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0일까지 대략 1,600만 명이 신고를 했다. 78%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

 

• 미나미 타로(南太郞): 당시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에 대한 우회적 우롱이다.

• 히로카와 히토(裕川仁): 쇼와일왕 히로히토(裕仁)에 농간을 더한 것이다.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 두 글자씩 조합하면 축생(畜生)이 된다. 이는 사람이 기르는 짐승을 일컫는 말로,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빌어먹을’, ‘개새끼’라는 뜻이다.

• 이누쿠소 구레(犬糞飾衛): 문자 그대로 ‘개똥이나 처먹어라’는 의미이다.

• 지요다(千代田): 도쿄 중심부에 있는 지명인데, 빨리 발음하면 조선어 ‘쪼다’와 거의 유사하게 발음된다. 일본 사람이 한국인을 낮잡아 말할 때 ‘조선삐’라고 말했는데 한국인이 일본인을 멸시할 때는 ‘쪼다’ 또는 ‘쪽바리’라고 했다. 이 용어는 소나 말의 발굽을 가리킨다. 결국은 ‘~새끼’라는 의미가 된다.

 

관공서에서 이런 이름을 접수해주었을까? 담당관은 신고하러 온 사람에게 불경하다고 호통 치며 따귀를 후려갈겼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신영일(申英一)이라는 사람이 에하라 노히라(江原野原)라는 일본 이름을 신고했다. 담당관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신영일은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답했다. 그저 가만히 두고 상관하지 말아달라는 기분으로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새끼’라는 욕설과 함께 담당관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상의 이름은 모두 저항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이름을 관공서에 신고하면 받아줄 리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것은 일제에 대한 분노의 항의였으리라. 일제강점기 만주에서는 무장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분투했고, 의열단은 의거를 통해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일 때 민중은 자신들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일체화의 모습이요, 일제로의 우리 민중의 저항의 표상이었다. 나라 팔아 호위호식하는 매국노를 보라. 저항으로서의 창씨개명은 오히려 숭고하게 느껴진다.

 

글 조의행(숭실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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