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이 공산주의라고 하지만 고유문화는 살아 있다.

 

북쪽의 어머니들 새벽에 중요한 일을 치를 때 정화수 떠 놓고 빌어

새벽에 깨끗하고 맛 좋은 물을 떠 다가 마당에 나가서 소원 기도

북 조선로동당은 정화수 기도 등을 미신으로 세뇌시키지만 이어져

 

▲서기2017.11월 서울 우이동에서 동학단체가 주관한 화백회의 모임에서 사용된 정화수 그릇과 받침대.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북두칠성신에게 장독대에 맑은 물을 떠 놓고 소원을 빌었다. 종교 차원에서는 오늘날 동학의 천도교에서도 맑은 물을 떠 놓고 청수기도를 올린다. 무당의 신당 제단도 물을 떠 놓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또 굿을 할 때 물동이를 놓고 그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추기도 한다.

북쪽은 서기 1948년 9월 항일 빨치산 세력과 독립군 세력이 주축이 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국가지도 이념은 서양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에 뿌리 박고 있다.

6백여 년 전 리성계와 주자학자들이 한패가 돼 리조선을 세우면서 기존의 문화, 풍습을 폐기하고 성리학을 국가지도 이념으로 하여 공자교 풍습을 강제하여 뿌리내렸다.

우리의 고유 풍습인 민간의 굿과 무당을 음사라 하여 천민 계급으로 만들고 탄압하며 말살하고자 했다.

불교도 재판 없이 처단했다. 불교 승려를 난신적자라 하여 “누구든지 붙잡아 처단하면 되는 것이지 반드시 재판관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까지 했다.

이 말은 누가 했을까. 흔히 리조선 개국의 설계자라고 불리는 삼봉 정도전이 한 소리다. 불교도 사상적으로 비판하여 백해무익한 것으로 낙인찍었다. 삼봉이 쓴 <불씨잡변>에서 극렬하게 나타난다.

리조선 개창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풍습을 폐기하고 유학 그것도 중국 남송 시절 주희의 성리학으로 새 나라를 열었다.

서기 1948년 9월 들어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구습을 폐기하고 서양사상인 공산주의로 새 나라를 열었다. 토지국유화를 통해서 국가체제 기틀을 잡고 공장 등 사유재산을 국유화했다.

또 국민정신을 개조한다고 공산주의 이념으로 인민들의 정신을 바꿔나갔다. 특히 소련의 레닌-스탈린주의로 무장시켰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물론을 숭배하는 공산주의는 기존의 정신 관련 무형의 문화를 죄악시했다.

그중에 우리 고유의 풍습이 많이 들어가 있다. 대표가 굿과 무당이다. 현재도 북조선은 굿과 무당을 인정하지 않고 금지하고 있다. 다만 점치는 것은 눈감아 준다고 한다.

다른 풍습도 금기시하고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당시 남녀노소 불문하고 저녁만 되면 사상교육 한다고 지역 단위별로 집집에 인민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이 교육이 너무 질리고 견디기 힘들어 당시 자유 왕래가 가능한 시기에 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생 공산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사상교육을 받으려고 하니 할머니 처지에서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 탈북주민이 자신의 얼굴책(facebook)에 글 한 꼭지를 올렸는데 우리 고유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맑은 물을 떠 놓고 비는 풍습이다. 이 풍습은 배달겨레라면 원시 토속 문화라고 할 만큼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배달겨레의 유전인자에 새겨져 있을 만큼 뿌리가 깊다. 아무리 외세의 사조가 해일처럼 밀려와서 우리의 뼛속까지 갉아먹으려고 하지만, 본성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절박할 때 하나님을 찾듯이 정화수를 떠 놓고 자식의 무사 안녕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기타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비는 풍습을 없앨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 탈북민은 북쪽에도 어머님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한 그릇 떠 놓고 비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북의 풍습을 소개했다. 자신 어머님의 예를 들어 탈북하기 전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던 것을 추억하며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줬다.

대체로 집안에 중병을 앓는 환자가 있거나 자녀 중에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때 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은 자신의 고향 마을에 샘물이 있는데 물맛도 제일 좋아서 거기서 떠왔다고 했다.

물은 자신의 부친이 길어왔는데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갔다 왔다고 한다. 어머님이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떠온 물로 어머님이 마당에서 빌었다며 추억했다.

나중에 부친이 러시아에 간 뒤로는 동생들이 떠 왔는데 자신은 맏형이라 집안을 책임지고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안 길었다고 웃으면서 회상했다.

그 덕분에 학교 졸업하던 해에 정무원시험에서 11등 했다고 자랑했다. 물론 어머니의 청수기도 정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들이 미신은 백해무익하다고 배웠고 모두 조선로동당 당원이었다며 이것으로 봐서는 절대 정화수 떠 놓고 빌 분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수를 떠 놓고 비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당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부모님이 현재도 북쪽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에게 현재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남한에 계신다고 했다. 탈북할 때 함께 내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는 그의 글 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북쪽 어머님들도 새벽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비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집안에 중병을 앓는 환자가 있거나 자녀들 중에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때면 빕니다.

우리 고향 무산에 량영골과 성주골, 탐사대 쪽 굴에서 나오는 샘물이 물맛이 제일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길어다 마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물길러 다녀오면 운동도 되고 깨끗하고 맛 좋은 물을 마실 수 있으니까 그곳에 가면 물길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긷습니다.

저의 집에선 새벽이면 아버님이 자전거를 타시고 물길러 가셨습니다.

물론 어머님이 빨리 일어나서 물 길어오라고 시킵니다.

아버님이 물을 길어오시면 어머님은 마당에 나가서 비시더라고요.

전 젊으신 분들이 왜 저러시나하고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러시아에 가신 다음에는 동생들이 떠 왔죠.

집안을 떠메고 나갈 맏형님은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ㅎㅎㅎ

부모님들도 미신은 백해무익하다고 배운 분들이고 두분 모두 조선로동당 당원들이셨거든요.

그런데도 청수를 떠놓고 비시는 걸 보면서 이해되지 않았었죠.

공부는 내가 하는데 어머님이 빈다고 달라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여튼 전 어머님이 정성 들여서 빈 덕분인지 졸업하던 해에 정무원시험에서 11등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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