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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허균과 명나라 이탁오성리학 조선시대의 남존여비사상은 아직고 건재하다.
류돈하 객원기자 | 승인 2020.10.12 17:59

 

글: 류돈하(역사연구가)

 

명나라 이탁오, 조선의 허균 모두 새 시대를 여는 개혁가

모두 관리였고 유학에서 시작했으나 유학을 뛰어 넘은 이단아 

이탁오는 신분제 폐지와 여성인권도 남성과 동등하다고 주장

허균은 정치적 금고와 사회적 차별의 서자와 어울리고 구제시도

 

 

▲ 이탁와 허균은 신분해방 까지 생각한 선각자들이었다.

(허균과 이탁오)

명나라 임탁오(1527~1602)와 조선의 허균(1569~1618)은 새 시대를 꿈꾼 개혁가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신분의 타파와 민중들의 권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한 양 선생은 유학반도이자 유교사상을 초월하였으며, 이단아로 배척받기까지도 했다.

특히 이탁오는 유불선 삼교는 물론 회교에 능통하였고 지방행정관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25년간 공직생활을 마친 후 다양한 독서와 방대한 저술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1602년 장문달의 탄핵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자살로 최후를 마쳤다.

유자로서 머리를 깎고 불교.법가 등을 찬양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여자들과 가까이 지냈으니 음란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 원중도가 변호한 바와 같이 이탁오는 노년의 학자인 데다 원래부터 여색을 멀리한 사람이었다. 원중도는 이탁오를 일컬어 평하기를 기개가 곧고 그 절조가 맑다 하였다.

이탁오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다고 여겼으며 식견과 능력에 있어 양성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여성의 순장이 존재했고 전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굴레가 되었던 시기에 이탁오의 여성관은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다.

교산 허선생 역시 천주교를 접촉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도교에도 정통하였다. 교산은 불교의 가르침이 유교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선비의 습속을 맑게 하는 것은 유교이지만 인심을 깨우치는 것은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하는 불교라 하였다.

특히 작은 형 허봉이 소개해준 사명당 유정과는 친분이 깊어 제형지교(弟兄之交)의 관계였다.

징비록에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서애 류성룡이 보낸 격문을 읽고 눈물 흘리며 승병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나온다.

교산은 유불선 등 동양의 전통사상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의 가톨릭에도 관심을 보였다. 1614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사들여 온 4천여 권의 책 중에 천주교 12단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산은 종종 조선 최초로 천주교를 수입해온 사람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천주교 문화권인과의 조우로 논하자면 엄밀히 처음은 아니다.

이미 고려시대인 1333년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충선왕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과 고려의 재상

곡성 부원군 염제신이 원나라에서 독일(프랑크 왕국)사신과 만나 본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서양과 만남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탁오 역시 당대 명나라로 정착한 이탈리아인 예수회 신부 이마두와 세 번의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국 땅에 천주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스스로 유자를 자처한 이마두의 행보가 이탁오에게는 그리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 눈의 서양인이 동양의 문화를 존중하는 그 성의가 동양인들로서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교산은 정치적 금고와 사회적 차별을 받는 서자들과 어울려 그들의 불우함을 구제하는데조력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대부들이 이단으로 배척한 점과 정치적 선택의 한계로 이이첨의 간계가 더해져 처형당해야만 했다.

허경진 선생의 허균 평전에는 교산이 광해군정권을 전복하고자 혁명을 기도한 듯이 묘사되었으나 허균이 목표로 내건 정적은 광해 정권의 발목을 잡은 인목대비 측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찌 되었든 역적으로 몰려 죽은 허균은 이탁오에 비하면 가혹할 정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광해군과 더불어 이름마저 금기시되었다.

양 선생의 공통점을 논하자면 민중 의식이 담긴 충의수호전을 이탁오가 썼고 허균은 서얼들을 대변하는 홍길동전을 집필했다.

보통 선비.문인들의 문집은 사후에 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교산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살아생전에 스스로 편찬하여 사위 이사성(동고 이준경의 손자), 외손자 이필진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보존토록 하였다.

교산은 이탁오 못지않게 저술력이 방대하였다. 성소부부고 외에 시 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 양천허씨 친족들의 시를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 음식평론서 도문대작(屠門大嚼) 등이 있다.

딱 반백 년만 살다간 허균은 노년기가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집필한 저서들은 매우 의미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산의 학문적 연원을 논하자면 서애 류성룡의 문하생으로 18세 때 학문과 문장을 배웠다.

그 자형이 서애와 함께 남인을 이끌던 추연 우성전이고 보면 교산 또한 남인에 가깝다. 그러나 교산의 당색은 북인 대북파이다.

명나라의 이탁오와 조선의 허균은 시대의 이단아라는 누명에 가려졌던 인물이다. 주자 성리학이 교조화되어 통치하던 시절에 성리학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였다. 자유롭다고 하여 방탕치 아니했거니와 파격적이다 하여 해가 되지 않았다.

양 선생의 삶은 실학과 근대의 동력이 되는 까닭에 오히려 죽고 나서 그 사상이 하나씩 발현됐다.

일찍이 진성이씨 이가원 선생은 교산 허균을 일컬어 조선의 이탁오라 하였듯이 양선생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근대를 준비하는 그 변곡점이 되는 시기에 분명 시대를 앞서 나갔다.

양 선생의 자취가 그러하니 어찌 선각자가 아니겠는가?

류돈하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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