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20.10.22 목 21:36
상단여백
HOME 쟁점기사
일제는 구한말 이미 ‘단군’을 가짜로 만들어일제가 식민통치목적으로 만든 날조 역사를 지금 국사 교과서가 잇고 있다.
김상윤 | 승인 2020.09.18 23:37

 

글: 김상윤(역사연구가, (사) 윤상원 기념사업회 고문 )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우리의 상고사를 압축하여 소개한 것

일연은 자기 생각은 주석으로 달고 기존 사료로 상고사 전해

한인-> 한웅-> 단군의 장구한 역사를 역사와 신화형으로 기록

나폴레옹 이집트 침략에 나서면서 167명 학술조사단도 같이가

육당 최남선 변절 전 일제의 단군파괴에 몇 배로 반박 기사 써

 

▲나카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 그는 서기1994년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를 내놓았고 이후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등 식민사학의 거두들이 단군을 가짜, 전설로 만드는데 참여하였다. 사진자료: 일본위키

 

단군신화 3

<삼국사기>(1145)는 대부분 내용이 삼국의 역사를 벗어나지 않았고, 유가적 입장에 속박되어 획일적 취사선택을 하였다면, <삼국유사>는 삼국보다 훨씬 앞선 내용도 싣는 등 <삼국사기>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편찬된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 전래의 재료를 활용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기한 일이나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수집하여 기록한 내용이 많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편에는 '고조선(왕검 조선)'이라는 1편을 조선 이하 부여 마한 삼국의 건국 설화와 함께 수록하였다.

고조선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고도 하고 또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대였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하여 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기에 천부인 세 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 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에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빌면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주와 마늘 스무 매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얻어서 먹으며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서 늘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고 아이를 낳아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

그는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니, 50년은 경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이름을 궁(일설에는 방이라고도 한다) 혼살 또는 금미달이라고 하였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으로 삼았고, 한은 세 개 군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통전>도 이 설과 같다. (<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네 군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세 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최남선은 처음과 끝에 인용한 <위서>나 <한서>는 어찌 되었던지, <고기>를 인용하더라도 일연은 자신의 의견은 반드시 주를 달아 따로 기록한 것을 보면 그 원문 존중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 () 안에 있는 글은 일연의 주.

* 배구(557~627)는 수 양제에게 고구려를 침략하라고 꼬드긴 사람인데 당나라에서도 중용되었다.

* 고죽국은 지금 북경 난하 유역에서 요서지역에 걸쳐 있던 나라로서, 백이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들이었다.

배구전에는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단군신화 4

단군신화는 일찍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 발표된 나카 미치요의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를 시발로,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등 식민사학의 거두들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의 단군신화 연구는 실증사학이라는 방법론의 가면 아래 출발부터 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벌할 때 167명의 학술조사단을 데리고 갔던 것도 정벌을 수월하게 완수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민속지(民俗誌) 연구나 박물학, 인류학 등은 대부분 제국주의의 전위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학자들의 단군신화 연구 역시 그 목적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남선이 동아일보에 '단군론'을 개재하기 시작한 1926년에는 일본학자들이 이미 단군신화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 상태였고, 최남선은 이런 일본학자의 연구를 반박하기 위해 '단군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단군론은 230쪽이 넘는 분량인데, 일본학자들의 여러 글을 50쪽 분량으로 요약하고, 그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50쪽 분량으로 쓰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에는 많은 주가 달리는데, 저자 주의 분량이 130쪽 정도이니 본문 내용의 두 배가 넘는 셈이다.

최남선이 달아 놓은 주는 가히 국학의 보라고 할 만큼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논증을 거친 후, 2년 뒤에 다시 '단군 및 그 연구'(원제목은 壇君及其硏究)를 썼는데, 최남선 단군론의 총결산이자 집대성이라 평가된다고 한다.

'단군고기전석'(檀君古記箋釋)은 1954년 사상계 2월호에 실렸는데, 단군신화를 25개 항목으로 나누어 주석 작업을 한 것이다.

이제 최남선의 글을 번역한 자들의 해설을 중심으로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해보자(5편에서 계속).

김상윤  mukto@naver.com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조선사(주) | 주소 : 서울 강남구 역삼로7길 17, 네스빌 609호  |  대표전자우편: mukto@naver.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오종홍
발행인 : 나한엽  |  편집인 : 오종홍  |   등록번호 : 서울 아03803  |  등록일자 : 서기2015.06.22.
Copyright © 2020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